먼저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이제 드디어 사순 일기를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네요. 그동안 되지도 않는 글 읽어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시작하기 전에는, 그래도 할만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 시작은 했는데, 글쓰는 데 집중할 만한 시간도 많지 않고, 그러다보니 잠을 충분히 자질 못해서 머리도 맑지를 못한 날이 많아서,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생각을 마구잡이로 쏟아 놓아, 마치 설익은 음식을 손님께 대접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특히나 이메일로 제 블로그 글을 받아보시는 분들께는 죄송하단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늦은 시각까지 글을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달된 경우가 종종 있어서, 이게 무슨 소린가 한 적도 꽤 있지 않으셨을까 싶네요. 사실상 많은 글들이 포스팅되고 난 이후에 (특히나 결론 부분은) 꽤 많이 고쳐졌답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으로는 얻은 것도 많았습니다.
머릿속에 들어있던 온갖 것들을 글로 옮겨 놓음으로써 다시 뭔가 새로운 것들로 채울 수 있도록 많이 비워졌구요, 새로이 알게 된 것들도 많습니다. 보라색 꽃들이 그렇게 많은지도 처음 알았고, 마우스 클릭 몇번으로 루르드 성지에 촛불을 밝힐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사순 일기 덕분에 금육이나 금식 같은 것도 잘 지킬 수 있었고, 저의 일상과 하느님을 연결시키는 노력도 매일매일 할 수 있어서 이번 사순은 제게는 여러모로 의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뭔가를 계속 쓸 수 있게 해달라는 저의 기도에 대한 응답도 많이 받았던 것 같아 하느님이 제 기도를 듣고 계심을 느낄 수 있어 좋았고, 몇가지 주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깊이있게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얻은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쁘다 바쁘다 해도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부족한 시간을 잘 활용하는 요령도 생겼고, 짧은 시간 내에 좀 더 잘 집중하는 법도 많이 터득한 것 같네요. 그동안 시간이 너무 없다며 못하고 미뤄왔던 많은 일들을 이제부터는 좀 더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시간을 좀 더 보람차게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사히 사순 일기를 마무리지을 수 있도록 힘과 영감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부활 성야 미사를 마치고 집에 늦은 시간에 돌아와 그냥 잠이 들어버리는 바람에, 어제는 마지막 이틀간의 사순 일기를 마무리 짓느라고 새벽 3시에 잤는데, 오늘은 일단 잠부터 자야 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좀 더 새로와진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Monday, March 28, 2016
Day #47: Light - 세상을 밝히는 예수님의 빛
| 어둠 속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부활초를 들고 입장하시는 교황님 (Credit: http://stocktondiocese.org/) |
오랜만에 성가대 자리에 섰습니다. 온통 노래들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에 관한 노래로 가득찼네요. 그래서 저도 노래합니다.
사랑은 나의 마음 속에서 밝게 불타오르고 (Love, Burns Bright, GIA 2014)
당신의 권능과 영광이 나의 삶을 밝혀주시니 (Worthy Is the Lamb, OCP 1997)
나의 기쁨을 어둠의 밤으로 가져가 (Alleluia! Love Is Alive, OCP 2012)
당신의 거룩한 사람들을 세상이 볼 수 있는 빛이 되게 하소서. (Christ, Be Our Light, OCP 1993)"
부활초로부터 전해받은 불꽃을 태우는 저의 이 촛불과 같이, 이제는 제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예수님의 빛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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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46: Vigil - 10년만의 부활 성야 미사
방금 부활 성야 미사에 다녀왔습니다.
그동안은 내내 저희 성당의 부활 성야 미사만 다니다가, 이번엔 처음으로 동네 성당의 부활 성야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이런 대축일 미사를 아이들이 자기들에게 가장 편한 언어로 보았으면 하는 바램이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처음인 것은 부활 성야 미사를 영어로 봤다는 사실 뿐만이 아니로군요. 큰 아이 같은 경우, 유치원 이후로 부활 성야 미사에 참례한 것이 이번이 처음입니다. 정확히 10년만에 처음이네요.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성삼일을 모두 빠지지 않고 성당에 나온 것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사순 시작때부터 작정을 했던 것은 아니었고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었지만, 제가 제 손으로 제 등을 잘 했다 하고 토닥토닥 두들겨 주고 싶네요.
10년전, 분위기 파악 못하고 부활 성야 미사에 갔다가, 게임기 가지고도 달래지지가 않을 정도로 그 긴긴 미사 동안, 몸을 비비틀며 주변에 앉은 사람들까지 분심들게 만드는 큰 아이와 졸려서 찡찡대는 작은 아이와 씨름하느라 다음날 몸살이 난 다음부터는, '애들 데리고는 절대 못 볼 미사'로 분류해 버리고나서 애들한테 한번도 부활 성야 미사 가자 소리를 하지 않았던 덕에, 오늘 큰 아이를 미사에 데리고 나오기는 쉽지가 않았습니다.
철수: "어제도 가고 그제도 갔쟎아?"
지아나: "일년 중에 가장 중요한 3일이야. 어제 그제 갔어도 오늘 안 가면 의미가 없는 거야."
철수: "그냥 주일 미사만 보면 안되는 이유가 뭐야?"
지아나: "주일날 보는 부활절 미사는 간단 버전이고, 오늘 보는 미사가 진짜 부활절 미사야. 너 한번도 제대로 부활 성야 미사 본 적 없쟎아. 그 미사도 한번 안보고 어른이 되는 건 부끄러운거야."
철수: "숙제 가져가서 하면 안 돼?"
지아나: "그래도 되는 거였으면, 아예 가자고 하질 않았지."
철수: "난 미사내내 그냥 잘거야."
지아나: "그래, 졸리면 그냥 자."
철수: "영희(동생)는 그렇게 긴 미사 보기엔 아직 너무 어리쟎아?"
지아나: "영희는 그래도 긴 미사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철이 들었어. 너는 철이 들었어야 하는 만큼 나이를 먹었고."
무슨 말을 해도 요리조리 빠져나갈 구석을 찾길래, "엄마가 너로 하여금 새로운 것에 도전하게 하는 거야"라고 했더니만 더이상 얘기를 못하더군요 (요즘 '도전'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었거든요). 그래서 결국은 큰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당에 미사 시작 5분전에 도착했는데, 성당 밖에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대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나 했는데, 알고 보니 여기 성당은 마치 성지 가지 주일에 사람들이 밖에서 성 가지를 흔들며 성당 안으로 입장을 하듯, 밖에서 부활 초에 불을 붙인 다음 각자 초에 불을 붙여 성당 안으로 촛불을 들고 입장하면서 빛의 예식을 시작하더군요. 그런데 그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촛불을 붙여 들고 들어오면서도 여러번 꺼뜨려 다시 붙이고 또 다시 붙이고 성당안에 들어와서도 촛불 가지고 장난치는 큰 아이를 보면서 '언제 철들라나...' 싶기도 했지만, 잘 모르는 화답송이나 성가들도 나름 열심히 따라 부르고, 그 긴 여러차례의 독서 중에도 졸지 않고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모습이 그래도 기특했습니다. 뭔가를 보면서 손톱을 물어뜯고 다리를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은 뭔가 굉장히 집중했을때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이거든요.
2시간까지는 어느 정도 버틴다 싶었는데, 2시간이 넘어가기 시작하자 언제 끝나느냐고 계속 물으며 주리를 틀기 시작하더군요. 미사는 약 2시간 반정도 걸렸는데, 끝날 무렵 퇴장 성가가 나올때 저를 옆구리로 툭툭 치며 저쪽을 한번 보라며 눈짓을 했습니다.
그쪽을 보니, 어느 젊은 부부가 완전히 잠에 곯아떨어진 아이를 하나씩 들쳐업고 퇴장 행렬이 시작되기 전에 성급히 성당을 나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딱 10년 전에 너희 모습 생각난다" 하고 얘기했더니 큰 아이가 씨익 웃더군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10년 전에 저랬을라나 하는 생각을 자기도 했는가 봅니다.
드디어 미사가 끝나고 성당을 나섰습니다. 자기는 미사 중에 잠자야 한다며 굳이 맨 뒷줄에 자리를 잡았던 덕에 군중들 중에서는 거의 맨 처음으로 성당을 나섰습니다. 성당을 나서자 마자 퇴장 행렬을 막 마친 복사들에게 주임 신부님이 안수와 강복을 해 주고 계셨습니다.
그 옆을 지나쳐 아이들이 주차장으로 걸어나가길래 붙들어 세우고, 신부님이 강복을 마치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부활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였습니다. 그냥 갈 수도 있는데 굳이 인사를 드리고 싶었던 이유는, 그 전날 성금요일 십자가 경배와 미사 없는 영성체 예식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데 이 신부님이 저희에게 굉장히 관심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금요일 예식 내내 저희 바로 뒤에 앉아계셨는데, 그것 때문인지 아니면 나이어린 학생들이 별로 많지 않았는데 그래서 일부러 좀 챙겨주셨는지 아니면 뭔가가 눈에 띄셨는지 집에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히 큰 아이에게 '이름이 뭐냐, 우리 전에 인사 나눈 적이 있었냐, 만나서 정말 반갑다' 하며 관심을 보여 주셨거든요.
신부님이 강복을 마치시길래 신부님께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처음으로 다다가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금방 알아보시더군요. 큰 아이를 보면서 "우리 어제 만났지? 이름이 뭐였드라..." 하면서 아주 비슷하게 맞추시더라구요. 그리고 미국 사람에게는 어려운 제 이름도 비슷하게 맞추시고... 그러더니 이번에는 성씨까지 물어보시더군요 (그것까지 기억하시기에는 좀 어려우실텐데...). 어쨌든 이번에도 큰 아이 손을 꼭 잡으며 "미사에 와 주어서 정말 고맙다"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사실은 제가 더 고마왔습니다.
이번 부활 성야 미사가 아이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지 궁금합니다. 그렇지만, 묻지는 않았지요. 그건 어쩌면 그 아이에게는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나오는 '코어 메모리(Core Memory)'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보기에도 따뜻해 보이던 그 신부님의 손길을 그 안에 오래오래 간직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동안은 내내 저희 성당의 부활 성야 미사만 다니다가, 이번엔 처음으로 동네 성당의 부활 성야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이런 대축일 미사를 아이들이 자기들에게 가장 편한 언어로 보았으면 하는 바램이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처음인 것은 부활 성야 미사를 영어로 봤다는 사실 뿐만이 아니로군요. 큰 아이 같은 경우, 유치원 이후로 부활 성야 미사에 참례한 것이 이번이 처음입니다. 정확히 10년만에 처음이네요.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성삼일을 모두 빠지지 않고 성당에 나온 것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사순 시작때부터 작정을 했던 것은 아니었고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었지만, 제가 제 손으로 제 등을 잘 했다 하고 토닥토닥 두들겨 주고 싶네요.
10년전, 분위기 파악 못하고 부활 성야 미사에 갔다가, 게임기 가지고도 달래지지가 않을 정도로 그 긴긴 미사 동안, 몸을 비비틀며 주변에 앉은 사람들까지 분심들게 만드는 큰 아이와 졸려서 찡찡대는 작은 아이와 씨름하느라 다음날 몸살이 난 다음부터는, '애들 데리고는 절대 못 볼 미사'로 분류해 버리고나서 애들한테 한번도 부활 성야 미사 가자 소리를 하지 않았던 덕에, 오늘 큰 아이를 미사에 데리고 나오기는 쉽지가 않았습니다.
철수: "어제도 가고 그제도 갔쟎아?"
지아나: "일년 중에 가장 중요한 3일이야. 어제 그제 갔어도 오늘 안 가면 의미가 없는 거야."
철수: "그냥 주일 미사만 보면 안되는 이유가 뭐야?"
지아나: "주일날 보는 부활절 미사는 간단 버전이고, 오늘 보는 미사가 진짜 부활절 미사야. 너 한번도 제대로 부활 성야 미사 본 적 없쟎아. 그 미사도 한번 안보고 어른이 되는 건 부끄러운거야."
철수: "숙제 가져가서 하면 안 돼?"
지아나: "그래도 되는 거였으면, 아예 가자고 하질 않았지."
철수: "난 미사내내 그냥 잘거야."
지아나: "그래, 졸리면 그냥 자."
철수: "영희(동생)는 그렇게 긴 미사 보기엔 아직 너무 어리쟎아?"
지아나: "영희는 그래도 긴 미사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철이 들었어. 너는 철이 들었어야 하는 만큼 나이를 먹었고."
무슨 말을 해도 요리조리 빠져나갈 구석을 찾길래, "엄마가 너로 하여금 새로운 것에 도전하게 하는 거야"라고 했더니만 더이상 얘기를 못하더군요 (요즘 '도전'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었거든요). 그래서 결국은 큰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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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 성야 미사의 빛의 예식 장면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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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의 예식 장면 2 |
성당에 미사 시작 5분전에 도착했는데, 성당 밖에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대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나 했는데, 알고 보니 여기 성당은 마치 성지 가지 주일에 사람들이 밖에서 성 가지를 흔들며 성당 안으로 입장을 하듯, 밖에서 부활 초에 불을 붙인 다음 각자 초에 불을 붙여 성당 안으로 촛불을 들고 입장하면서 빛의 예식을 시작하더군요. 그런데 그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촛불을 붙여 들고 들어오면서도 여러번 꺼뜨려 다시 붙이고 또 다시 붙이고 성당안에 들어와서도 촛불 가지고 장난치는 큰 아이를 보면서 '언제 철들라나...' 싶기도 했지만, 잘 모르는 화답송이나 성가들도 나름 열심히 따라 부르고, 그 긴 여러차례의 독서 중에도 졸지 않고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모습이 그래도 기특했습니다. 뭔가를 보면서 손톱을 물어뜯고 다리를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은 뭔가 굉장히 집중했을때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이거든요.
2시간까지는 어느 정도 버틴다 싶었는데, 2시간이 넘어가기 시작하자 언제 끝나느냐고 계속 물으며 주리를 틀기 시작하더군요. 미사는 약 2시간 반정도 걸렸는데, 끝날 무렵 퇴장 성가가 나올때 저를 옆구리로 툭툭 치며 저쪽을 한번 보라며 눈짓을 했습니다.
그쪽을 보니, 어느 젊은 부부가 완전히 잠에 곯아떨어진 아이를 하나씩 들쳐업고 퇴장 행렬이 시작되기 전에 성급히 성당을 나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딱 10년 전에 너희 모습 생각난다" 하고 얘기했더니 큰 아이가 씨익 웃더군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10년 전에 저랬을라나 하는 생각을 자기도 했는가 봅니다.
드디어 미사가 끝나고 성당을 나섰습니다. 자기는 미사 중에 잠자야 한다며 굳이 맨 뒷줄에 자리를 잡았던 덕에 군중들 중에서는 거의 맨 처음으로 성당을 나섰습니다. 성당을 나서자 마자 퇴장 행렬을 막 마친 복사들에게 주임 신부님이 안수와 강복을 해 주고 계셨습니다.
그 옆을 지나쳐 아이들이 주차장으로 걸어나가길래 붙들어 세우고, 신부님이 강복을 마치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부활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였습니다. 그냥 갈 수도 있는데 굳이 인사를 드리고 싶었던 이유는, 그 전날 성금요일 십자가 경배와 미사 없는 영성체 예식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데 이 신부님이 저희에게 굉장히 관심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금요일 예식 내내 저희 바로 뒤에 앉아계셨는데, 그것 때문인지 아니면 나이어린 학생들이 별로 많지 않았는데 그래서 일부러 좀 챙겨주셨는지 아니면 뭔가가 눈에 띄셨는지 집에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히 큰 아이에게 '이름이 뭐냐, 우리 전에 인사 나눈 적이 있었냐, 만나서 정말 반갑다' 하며 관심을 보여 주셨거든요.
신부님이 강복을 마치시길래 신부님께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처음으로 다다가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금방 알아보시더군요. 큰 아이를 보면서 "우리 어제 만났지? 이름이 뭐였드라..." 하면서 아주 비슷하게 맞추시더라구요. 그리고 미국 사람에게는 어려운 제 이름도 비슷하게 맞추시고... 그러더니 이번에는 성씨까지 물어보시더군요 (그것까지 기억하시기에는 좀 어려우실텐데...). 어쨌든 이번에도 큰 아이 손을 꼭 잡으며 "미사에 와 주어서 정말 고맙다"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사실은 제가 더 고마왔습니다.
이번 부활 성야 미사가 아이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지 궁금합니다. 그렇지만, 묻지는 않았지요. 그건 어쩌면 그 아이에게는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나오는 '코어 메모리(Core Memory)'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보기에도 따뜻해 보이던 그 신부님의 손길을 그 안에 오래오래 간직해 주었으면 합니다.
Friday, March 25, 2016
Day #45: Passion - 톰 신부님을 위한 기도
많은 분들이 아마도 이 메시지를 접하지 않으셨을까 생각합니다.
저도 성목요일 아침에 어떤 분으로부터 이 메시지를 받고 가슴이 많이 저리고 마음이 아파서 출근길에 마주친 얼굴들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자리에 앉자마자 어찌된 일인지 인터넷부터 뒤졌습니다.
제가 특별히 주목했던 인터넷 기사는 다음 두 곳입니다. 두군데 다 믿을만한 가톨릭 뉴스 웹사이트입니다.
http://www.catholicnewsagency.com/blog/what-we-know-and-dont-about-the-missing-priest-from-yemen/
http://www.ucanews.com/news/salesians-dismiss-torture-rumors-of-kidnapped-priest/75524
이 두군데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톰 신부님이 속해있는 살레시오 수도회가 현지 정부와 신부님의 행방을 찾기 위해 공식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였고, 바티칸에서도 이 신부님의 행방을 추적중에 있으나, 현재로서는 이분의 행방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ISIS의 소행이라고 알려져 있는 소문과는 달리, 이 신부님이 납치된 예멘의 양로원을 습격했던 괴한에 대해서는 신원이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합니다. 이 습격에 대해서 ISIS도, 알 카에다도, 어느 누구도 자신들이 주동했다고 주장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누가 어떤 이유로 그런 짓을 했는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위에 보시는 메시지는 남아프리카 지역의 Siessen 프란치스코 수녀회에서 페이스북에 게시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이후에 SNS를 통해 일파만파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지만 그 근거는 아직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하고, 톰 신부님이 소속한 살레시오 수도회에서는 이런 소문이 퍼져나가도록 한 페이스북에 공식적으로 항의를 하였고 이 소문에 대해서는 근거없는 것으로 일축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맨위에 보이는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실때는 반드시 이것이 확인되지 않은 소문임은 밝혀주시되, 납치되어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계실 톰 신부님이 무사히 돌아오시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도록 말씀드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왜 신부님을 납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 소문이 오히려 그 괴한들에게 그릇된 발상을 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많이 됩니다.
그래서 성금요일을 앞둔 이 시간, 톰 신부님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주님,
톰 신부님의 몸과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소서.
그분께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을 힘을 주소서.
주님,
그분을 납치한 자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주소서.
그자들을 용서하소서.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비춰주시어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비춰주시어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하소서.
그러나 주님,
톰 신부님이 주님께 희망을 둠으로 하여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면...
사도 바오로가 모진 고문 속에서도 옥중에서 주님을 찬미하였듯이
사도 베드로가 주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힐 수는 없다 하여 기꺼이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혔듯이
다른 모든 순교 성인들이 그러하였듯이
그분도 기쁨에 넘쳐 자랑스럽게 주님의 수난에 동참할 수 있도록
그분의 믿음을 굳건히 세워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Day #44: Water - 대가뭄과 인간과 하느님
오늘은 성목요일, 아마도 발씻김 예식이 있는 날이라서 주제가 "Water"로 정해진 것이 아닌가 싶네요.
성삼일의 전례는 언제나 참 특별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성목요일의 미사는 40일만에 부르는 글로리아(대영광송)가 언제나 가슴 뭉클하게 하지요. 작년에 이어 올해도 가까운 동네 성당을 다녀왔는데, 미리 정해진 12명만 신부님이 씻어주는 게 아니라 원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리에서 참여할 수 있게 해 주셔서 시간을 오래 걸렸지만 보기에 참 좋았습니다. 끝나고 모두들 "Jesus, remember me"를 부르며 현양제대 성체조배하러 줄지어 퇴장하는 것도 좋았지만, 저희같이 성체조배를 하지 못하고 그냥 주차장으로 걸어나오는 사람들도 차를 타러 가는 순간까지도 큰 소리로 입을 맞춰 노래부르며 걸어가는 모습은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발씻김 예식과는 상관없는 캘리포니아 물부족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할까 합니다.
많이들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캘리포니아는 역사상 유래없는 최악의 가뭄 사태를 맞고 있습니다. NASA에서는 이제 일년치의 물밖에 남지 않았다고 경고를 할 정도이니까요. [1]
물값이 하늘을 뚫고 나갈 정도로 올라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잔디밭에 물을 줄때 너무 많이 준다든가 각도가 좀 잘못되어 물이 길로 흘러나온다든가 하면 이웃에서 고발하도록 권장하고,
잔디밭에 물을 안주고 누렇게 떠 버리게 하는 사람들에게는 인조잔디로 바꿀 수 있는 장려금까지 지급하며,
물의 증발을 방지하기 위한 "Evaporation Ball"을 저수지에 띄워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태양빛에 물이 증발되는 것을 최대한 예방하는 등, 어떻게든 물을 아끼기 위하여 별별 묘수를 다 짜내고 있습니다.
집의 샤워 물값을 아끼기 위하여 휘트니스나 수영장의 샤워 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식당에서는 물을 달라고 요청하는 손님에게만 제공하며, 설겆이 물값이 일회용 그릇값보다 비싸다 보니 성당에서는 점심을 제공할때 일회용 그릇을 사용하고, 바짝말라 비틀어진 나무와 풀들 때문에 공원에서는 바베큐를 할 수가 없으며, 저도 설겆이할 때 흐르는 물 대신에 아이들이 학교에 싸들고 갔다가 남겨온 물과 먹다 남은 물들을 모아서 하는 식으로 생활 습관을 바꾸어야 하는 등, 물부족이 가져온 우리 삶의 변화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미사 중에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비를 내려달라는 보편 지향 기도문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도문을 듣고 있으면 마치 고대시대에 기우제를 지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생명을 복제해 내는데 성공하고, 세포가 복제될 때마다 조금씩 짧아지는 텔로미어의 발견으로 노화의 비밀에 한층 더 접근하였으며, 평균 수명 100세 시대를 눈앞에 두며 신의 영역을 조금씩 침범하여 들어가기 시작한 이 최첨단 시대에 사는 인간이, 겨우 수소 2개, 산소 하나의 결합체 H2O 하나를 해결하지 못해서 그 옛날처럼 드디어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이 대가뭄이 오게 된 것이 물론 우연한 자연 현상일 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피조물들을 일구고 돌보도록 맡겨진 우리 인간이 관리인의 소명은 게을리한 채 바벨탑만 쌓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 일까요?
이런 대가뭄을 통해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무능력한 존재인가를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무시무시한 경험을 통한 후에야만 깨달음을 얻게 되지는 않도록 아버지께 지혜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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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www.theguardian.com/us-news/2015/mar/16/california-water-drought-nasa-warning
성삼일의 전례는 언제나 참 특별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성목요일의 미사는 40일만에 부르는 글로리아(대영광송)가 언제나 가슴 뭉클하게 하지요. 작년에 이어 올해도 가까운 동네 성당을 다녀왔는데, 미리 정해진 12명만 신부님이 씻어주는 게 아니라 원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리에서 참여할 수 있게 해 주셔서 시간을 오래 걸렸지만 보기에 참 좋았습니다. 끝나고 모두들 "Jesus, remember me"를 부르며 현양제대 성체조배하러 줄지어 퇴장하는 것도 좋았지만, 저희같이 성체조배를 하지 못하고 그냥 주차장으로 걸어나오는 사람들도 차를 타러 가는 순간까지도 큰 소리로 입을 맞춰 노래부르며 걸어가는 모습은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발씻김 예식과는 상관없는 캘리포니아 물부족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할까 합니다.
| Credit: http://www.trbimg.com/ |
| Credit: http://madmikesamerica.com/ |
| 잔디에 물 주다가 이렇게 흘리면 엄청난 벌금형에 처해짐 Credit: http://www.santabarbaraca.gov/ |
| "Brown is the New Green" 캠페인 포스터 Credit: http://www.irwd.com/ |
| Evaporation Ball 투하식 장면 Credit: https://cdn2.vox-cdn.com/ |
| 어느 골프장의 그린의 모습 Credit: http://jacksonville.com/ |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생명을 복제해 내는데 성공하고, 세포가 복제될 때마다 조금씩 짧아지는 텔로미어의 발견으로 노화의 비밀에 한층 더 접근하였으며, 평균 수명 100세 시대를 눈앞에 두며 신의 영역을 조금씩 침범하여 들어가기 시작한 이 최첨단 시대에 사는 인간이, 겨우 수소 2개, 산소 하나의 결합체 H2O 하나를 해결하지 못해서 그 옛날처럼 드디어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이 대가뭄이 오게 된 것이 물론 우연한 자연 현상일 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피조물들을 일구고 돌보도록 맡겨진 우리 인간이 관리인의 소명은 게을리한 채 바벨탑만 쌓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 일까요?
이런 대가뭄을 통해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무능력한 존재인가를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무시무시한 경험을 통한 후에야만 깨달음을 얻게 되지는 않도록 아버지께 지혜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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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www.theguardian.com/us-news/2015/mar/16/california-water-drought-nasa-warning
Thursday, March 24, 2016
Day #43: Follow - 댄싱남(Dancing 男)에게서 배우는 교훈
Follow라는 말만 들으면 생각나는 비디오가 있습니다. 바로 간호 대학을 다닐때 들어야 했던 리더쉽 과목의 수업 중에 교수님이 보여주셨던 비디오 였지요. 따르는 자가 없이는 리더가 될 수 없고, 리더는 그 첫 추종자들을 동등하게 잘 대접해야 하며, 모든 사람이 리더가 되는 것도 좋지만 뭔가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을때 그 사람을 과감히 따라나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 요점이었습니다.
재미있는 비디오입니다. 한번 먼저 보시죠.
If you've learned a lot about leadership and making a movement, then let's watch a movement happened start to finish in under three minutes and dissect some lessons.
당신이 리더쉽이라든가 (조직적인) 운동을 시작하는 것에 대해 좀 안다고 생각한다면, 여기 있는 어떤 사건 한가지를 시작부터 끝까지 3분내로 한번 보면서 그 안에 담긴 교훈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A leader needs the guts to stand alone and look ridiculous. But what he's doing is so simple, it's almost instructional. This is key. You must be easy to follow!
리더는 남들 사이에서 튀어 조롱받을 배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가 하고 있는 것은 아주 단순해서 거의 교육적이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요한 열쇠입니다. 당신은 따라하기가 쉬워야 합니다.
Now comes the first follower with a crucial role. He publicly shows everyone how to follow. Notice the leader embraces him as an equal, so it's not about the leader anymore - it's about them, plural. Notice he's calling to his friends to join in.It takes guts to be a first follower! You stand out and brave ridicule, yourself.
이제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첫번째 추종자가 나타납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어떻게 따르면 되는지를 공개적으로 보여줍니다. 리더가 그를 동등한 위치에서 끌어안는 모습을 보십시요. 이제는 리더 한명의 일이 아니라, 그들 즉 한사람 이상의 일이 됩니다. 이 추종자가 자기 친구들을 불러들이는 모습을 보십시요. 첫번째 추종자가 되는데도 역시 배짱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그도 과감히 튀어 비웃음을 받게 될테니까요.
Being a first follower is an under-appreciated form of leadership. The first follower transforms a lone nut into a leader. If the leader is the flint, the first follower is the spark that makes the fire.
첫번째 추종자가 된다는 것은 리더쉽이지만 과소평가 되고 있습니다. 그 첫번째 추종자야 말로 고독한 또라이를 리더로 환골탈퇴시키는 장본인이 됩니다. 리더가 부싯돌이라면, 그 첫번째 추종자는 바로 불을 일으키는 불꽃이 됩니다.
The 2nd follower is a turning point: it's proof the first has done well. Now it's not a lone nut, and it's not two nuts. Three is a crowd and a crowd is news.
두번째 추종자는 전환점이 되어 줍니다. 이것은 첫번째 추종자가 잘 해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고독한 또라이도 아니고, 두명의 또라이도 아닙니다. 세명은 군중이고, 군중은 뉴스 거리가 됩니다.
A movement must be public. Make sure outsiders see more than just the leader.Everyone needs to see the followers, because new followers emulate followers - not the leader.
운동은 개방적이어야 합니다. 외부인들이 리더 이상의 것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추종자들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추종자들은 추종자들을 따라하지 리더를 따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Now we've got momentum. This is the tipping point! As more people jump in, it's no longer risky. If they were on the fence before, there's no reason not to join now. They won't be ridiculed, they won't stand out, and they will be part of the in-crowd, if they hurry. Over the next minute you'll see the rest who prefer to be part of the crowd, because eventually they'd be ridiculed for not joining. And ladies and gentlemen, that is how a movement is made!
두사람이 더 오고, 즉시 세사람이 더 늘어납니다. 이제는 가속도가 붙고 있습니다. 이것이 정점이 되지요! 이제는 새로운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뛰어들수록 더이상 위험부담은 없게 됩니다. 이들이 그전에는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함께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튀지도 않을 것이고, 조롱받지도 않을 것이고, 군중에 파 묻힐 것입니다. 조금 서두르기만 하면 말이죠. 이제부터 약 일분 동안은, 남은 사람들이 군중에 참여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만약 합세하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는 비웃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렇게 해서 바로 새로운 운동이 시작되는 겁니다.
Let's recap what we learned: If you are a version of the shirtless dancing guy all alone, remember the importance of nurturing your first few followers as equals, making everything clearly about the movement, not you. Be public. Be easy to follow!
우리가 배운 것을 다시 한번 정리해 봅시다. 만약 당신이 웃통을 벗은 댄싱남의 부류라면, 처음의 몇몇 추종자들을 동등한 입장으로 대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요. 당신이 아니라 그 움직임에 대해서 모든 것을 명확하게 하십시요. 개방적이어야 하고 따르기가 쉬워야 합니다.
But the biggest lesson here... did you catch it? Leadership is over-glorified. Yes, it started with the shirtless guy, and he'll get all the credit, but you saw what really happened: It was the first follower that transformed a lone nut into a leader.
하지만 가장 큰 교훈은 바로 이것입니다. 눈치 채셨나요? 리더쉽은 과도하게 미화된 것입니다. 물론 웃통을 벗은 댄싱 남으로부터 시작은 되었고 그가 모든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어떻게 일이 진행되었는지 여러분은 보셨습니다. 고독한 또라이 하나를 리더로 만든 것은 바로 그 첫번째 추종자입니다.
There is no movement without the first follower. We're told we all need to be leaders, but that would be really ineffective. The best way to make a movement, if you really care, is to courageously follow and show others how to follow. When you find a lone nut doing something great, have the guts to be the first person to stand up and join in.
첫번째 추종자없이는 새로운 운동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들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교육받고 있지만 그렇게 된다면 참으로 비효율적이 될 것입니다.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당신이 진짜로 운동을 시작하고 싶다면) 용기있게 따라 나서고 남들에게 어떻게 따르면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뭔가 멋진 일을 하고 있는 고독한 또라이를 보게 된다면, 벌떡 일어서서 함께 참여하는 첫 사람이 될 배짱을 가지십시요.
------------------------------
예수님과 열두제자를 생각해 봅니다. 열두제자를 처음에 예수님께서 뽑아 세우셨다고는 하지만, 카파르나움에서의 설교 이후에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났어도 열두제자는 그곁을 지켰지요.
만약 예수님에게 그 열두제자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요? 만약 예수님이 부르셨을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용기있게 따라나섰고,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이렇게 따라야 한다는 본보기를 직접 보여주었던 그 제자들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지금의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저희는 분명 예수님의 첫 추종자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2천년이 넘게 그분을 따른 수많은 제 2, 제 3, 제 4의 추종자들을 보고 따라하는 그런 추종자, 혹은 남들이 다 따르니까 안 따르면 오히려 조롱을 받을까 두려워 따라하는 그런 추종자는 아니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저희 한명 한명을 열두제자를 부르셨을때와 똑같이, 나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용기있는 첫 제자가 되도록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비디오입니다. 한번 먼저 보시죠.
If you've learned a lot about leadership and making a movement, then let's watch a movement happened start to finish in under three minutes and dissect some lessons.
당신이 리더쉽이라든가 (조직적인) 운동을 시작하는 것에 대해 좀 안다고 생각한다면, 여기 있는 어떤 사건 한가지를 시작부터 끝까지 3분내로 한번 보면서 그 안에 담긴 교훈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A leader needs the guts to stand alone and look ridiculous. But what he's doing is so simple, it's almost instructional. This is key. You must be easy to follow!
리더는 남들 사이에서 튀어 조롱받을 배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가 하고 있는 것은 아주 단순해서 거의 교육적이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요한 열쇠입니다. 당신은 따라하기가 쉬워야 합니다.
Now comes the first follower with a crucial role. He publicly shows everyone how to follow. Notice the leader embraces him as an equal, so it's not about the leader anymore - it's about them, plural. Notice he's calling to his friends to join in.It takes guts to be a first follower! You stand out and brave ridicule, yourself.
이제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첫번째 추종자가 나타납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어떻게 따르면 되는지를 공개적으로 보여줍니다. 리더가 그를 동등한 위치에서 끌어안는 모습을 보십시요. 이제는 리더 한명의 일이 아니라, 그들 즉 한사람 이상의 일이 됩니다. 이 추종자가 자기 친구들을 불러들이는 모습을 보십시요. 첫번째 추종자가 되는데도 역시 배짱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그도 과감히 튀어 비웃음을 받게 될테니까요.
Being a first follower is an under-appreciated form of leadership. The first follower transforms a lone nut into a leader. If the leader is the flint, the first follower is the spark that makes the fire.
첫번째 추종자가 된다는 것은 리더쉽이지만 과소평가 되고 있습니다. 그 첫번째 추종자야 말로 고독한 또라이를 리더로 환골탈퇴시키는 장본인이 됩니다. 리더가 부싯돌이라면, 그 첫번째 추종자는 바로 불을 일으키는 불꽃이 됩니다.
The 2nd follower is a turning point: it's proof the first has done well. Now it's not a lone nut, and it's not two nuts. Three is a crowd and a crowd is news.
두번째 추종자는 전환점이 되어 줍니다. 이것은 첫번째 추종자가 잘 해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고독한 또라이도 아니고, 두명의 또라이도 아닙니다. 세명은 군중이고, 군중은 뉴스 거리가 됩니다.
A movement must be public. Make sure outsiders see more than just the leader.Everyone needs to see the followers, because new followers emulate followers - not the leader.
운동은 개방적이어야 합니다. 외부인들이 리더 이상의 것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추종자들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추종자들은 추종자들을 따라하지 리더를 따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Now we've got momentum. This is the tipping point! As more people jump in, it's no longer risky. If they were on the fence before, there's no reason not to join now. They won't be ridiculed, they won't stand out, and they will be part of the in-crowd, if they hurry. Over the next minute you'll see the rest who prefer to be part of the crowd, because eventually they'd be ridiculed for not joining. And ladies and gentlemen, that is how a movement is made!
두사람이 더 오고, 즉시 세사람이 더 늘어납니다. 이제는 가속도가 붙고 있습니다. 이것이 정점이 되지요! 이제는 새로운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뛰어들수록 더이상 위험부담은 없게 됩니다. 이들이 그전에는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함께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튀지도 않을 것이고, 조롱받지도 않을 것이고, 군중에 파 묻힐 것입니다. 조금 서두르기만 하면 말이죠. 이제부터 약 일분 동안은, 남은 사람들이 군중에 참여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만약 합세하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는 비웃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렇게 해서 바로 새로운 운동이 시작되는 겁니다.
Let's recap what we learned: If you are a version of the shirtless dancing guy all alone, remember the importance of nurturing your first few followers as equals, making everything clearly about the movement, not you. Be public. Be easy to follow!
우리가 배운 것을 다시 한번 정리해 봅시다. 만약 당신이 웃통을 벗은 댄싱남의 부류라면, 처음의 몇몇 추종자들을 동등한 입장으로 대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요. 당신이 아니라 그 움직임에 대해서 모든 것을 명확하게 하십시요. 개방적이어야 하고 따르기가 쉬워야 합니다.
But the biggest lesson here... did you catch it? Leadership is over-glorified. Yes, it started with the shirtless guy, and he'll get all the credit, but you saw what really happened: It was the first follower that transformed a lone nut into a leader.
하지만 가장 큰 교훈은 바로 이것입니다. 눈치 채셨나요? 리더쉽은 과도하게 미화된 것입니다. 물론 웃통을 벗은 댄싱 남으로부터 시작은 되었고 그가 모든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어떻게 일이 진행되었는지 여러분은 보셨습니다. 고독한 또라이 하나를 리더로 만든 것은 바로 그 첫번째 추종자입니다.
There is no movement without the first follower. We're told we all need to be leaders, but that would be really ineffective. The best way to make a movement, if you really care, is to courageously follow and show others how to follow. When you find a lone nut doing something great, have the guts to be the first person to stand up and join in.
첫번째 추종자없이는 새로운 운동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들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교육받고 있지만 그렇게 된다면 참으로 비효율적이 될 것입니다.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당신이 진짜로 운동을 시작하고 싶다면) 용기있게 따라 나서고 남들에게 어떻게 따르면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뭔가 멋진 일을 하고 있는 고독한 또라이를 보게 된다면, 벌떡 일어서서 함께 참여하는 첫 사람이 될 배짱을 가지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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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열두제자를 생각해 봅니다. 열두제자를 처음에 예수님께서 뽑아 세우셨다고는 하지만, 카파르나움에서의 설교 이후에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났어도 열두제자는 그곁을 지켰지요.
만약 예수님에게 그 열두제자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요? 만약 예수님이 부르셨을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용기있게 따라나섰고,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이렇게 따라야 한다는 본보기를 직접 보여주었던 그 제자들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지금의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저희는 분명 예수님의 첫 추종자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2천년이 넘게 그분을 따른 수많은 제 2, 제 3, 제 4의 추종자들을 보고 따라하는 그런 추종자, 혹은 남들이 다 따르니까 안 따르면 오히려 조롱을 받을까 두려워 따라하는 그런 추종자는 아니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저희 한명 한명을 열두제자를 부르셨을때와 똑같이, 나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용기있는 첫 제자가 되도록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Wednesday, March 23, 2016
Day #42: Charity - 자선을 넘어 정의를 향해...
처음에 'Charity'라는 단어를 접했을때는, '자선'이나 '불우 이웃 돕기' 정도의 의미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자주 참조하는 교리서 YOUCAT을 보면 'Love'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더군요. 아마도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 정도의 뜻으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루에 1불이면 한 어린이가 더이상 배를 주리지 않아도 된다는 광고를 그리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의식주와 같은 생리적 욕구를 채우는 단계에서 허덕이고 있다면 사실상 동물이나 다름없는 존재에 머물고 말지요.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이 그 존엄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최소한 생리적 욕구는 안정적으로 해소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죠. 모든 인간이 자신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생리적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삶의 조건에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서로 다른 천성과 재능을 주심으로써 우리가 서로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1]
그렇지만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나요? 별 것도 아닌 집한채값이 백만불을 훌쩍 뛰어넘고 최고급 럭셔리 자동차가 길에 깔려있는 미국 내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로 손꼽히는 이 실리콘 밸리에서, 미국 내에서 가장 큰 노숙자 캠프 'Jungle'을 셧다운 시켜버렸습니다.[2]
돈이 돈을 버는 사회 구조가 되어, 돈이 있어야 돈을 벌 수 있고, 돈이 없으면 돈을 벌 수 없는 불평등이 깊이 뿌리내린지 이미 오래입니다. 이제는 돈을 가진 자들이 이제는 정보와 권력까지 차지하여 자신의 부를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한 이기적 목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그 불평등이 깊이 뿐만 아니라 넓게도 퍼져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청소년 교리서 YOUCAT #329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며, 그 존엄성의 수호와 촉진을 창조주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셨다는 것이고,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도 남녀 인간은 창조주께 엄정하게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회칙 <사회적 관심>)" 이제 내 이웃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은, 더이상 함께 의지하며 살아가는 차원을 뛰어넘어 우리의 책임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의의 근간이 바로 인간의 양도될 수 없는 존엄성을 존중하는 일입니다."[3]
한가지 기쁜 소식은 이렇게 불평등이 만연한 세상 속에서도, 정의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특별히 이 세분을 존경합니다.
첫번째는, 유명한 투자가 워렌 버펫입니다. 2010년에는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3번째로 돈많은 부자로 선정된 그는, 자신의 부의 99퍼센트를 기부하겠다고 맹세하였고 이미 순자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여 부의 재분배에 크게 기여하였지요. 하지만, 어마어마한 부의 정의 실현에 기여했다는 사실도 인상적이었지만, "재물을 많이 소유하다 보면, 재물이 그 주인을 소유하게 되더라"는 그의 철학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4]
두번째는, 120억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5]의 아버지 교황님입니다. 2천년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열쇠와 함께 건네주셨던 그분의 권위를 이어받으신 분이, 죄수들과 이교도들의 발에 엎드려 입을 맞추고, 아무도 가까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병자들을 끌어 안으며 낮은 곳으로 몸소 임하심으로써, 권력을 가진 자들이 모든 이들의 위에 군림하며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섬기는 일을 해야 한다는 권력의 정의를 직접 실천하신 분입니다.
세번째는, 칸 아카데미의 창시자 살 칸입니다. 하바드 대학을 졸업한 헤지 펀드 매니저였던 그가 교육에 관심을 가지면서, 직업도 그만둔채 방에 틀어박혀 앉아 미국 전체 교과 과정 강의를 하고 녹화하여 그 동영상을 계속해서 유투브에 올렸습니다. 돈이 없어도 세계 어디에서고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결국은 인터넷과 컴퓨터 한대만 있으면 세계의 어디서든 누구나 기본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교육의 정의를 실천한 인물이지요. 지금같이 칸 아카데미의 규모가 커지기 전에, 유투브를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한 그의 강의 동영상을 보고는 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설명도 그렇게 잘하는지 정말 괴물이라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답니다.
저희 아이들은 자신의 재능을 재분배하는 사람으로 커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저부터 그것을 실천해야 하겠죠. 남들이 부러워하는 재능을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그 책임은 더욱 더 무거워지는 것 같습니다. 정의로운 사회, 모든 인간이 그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땅에서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렵니다.
----------------
[1] YOUCAT #331
[2] http://www.mercurynews.com/bay-area-news/ci_27066589/jungle-san-jose-shuts-down-notorious-homeless-encampment
[3] YOUCAT #329
[4] http://www.foryourmarriage.org/the-common-good-a-call-to-charity-and-justice/
[5] http://www.bbc.com/news/world-21443313
우리는, 하루에 1불이면 한 어린이가 더이상 배를 주리지 않아도 된다는 광고를 그리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의식주와 같은 생리적 욕구를 채우는 단계에서 허덕이고 있다면 사실상 동물이나 다름없는 존재에 머물고 말지요.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이 그 존엄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최소한 생리적 욕구는 안정적으로 해소되어야 합니다.
| 매슬로의 욕구 단계 (출처: 눈높이 대백과 (http://newdle.noonnoppi.com/)) |
그렇지만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나요? 별 것도 아닌 집한채값이 백만불을 훌쩍 뛰어넘고 최고급 럭셔리 자동차가 길에 깔려있는 미국 내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로 손꼽히는 이 실리콘 밸리에서, 미국 내에서 가장 큰 노숙자 캠프 'Jungle'을 셧다운 시켜버렸습니다.[2]
돈이 돈을 버는 사회 구조가 되어, 돈이 있어야 돈을 벌 수 있고, 돈이 없으면 돈을 벌 수 없는 불평등이 깊이 뿌리내린지 이미 오래입니다. 이제는 돈을 가진 자들이 이제는 정보와 권력까지 차지하여 자신의 부를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한 이기적 목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그 불평등이 깊이 뿐만 아니라 넓게도 퍼져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세상에 필요한 것은 자선이 아니라, 정의다.
- 매리 울스턴크래프트 -
한가지 기쁜 소식은 이렇게 불평등이 만연한 세상 속에서도, 정의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특별히 이 세분을 존경합니다.
첫번째는, 유명한 투자가 워렌 버펫입니다. 2010년에는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3번째로 돈많은 부자로 선정된 그는, 자신의 부의 99퍼센트를 기부하겠다고 맹세하였고 이미 순자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여 부의 재분배에 크게 기여하였지요. 하지만, 어마어마한 부의 정의 실현에 기여했다는 사실도 인상적이었지만, "재물을 많이 소유하다 보면, 재물이 그 주인을 소유하게 되더라"는 그의 철학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4]
두번째는, 120억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5]의 아버지 교황님입니다. 2천년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열쇠와 함께 건네주셨던 그분의 권위를 이어받으신 분이, 죄수들과 이교도들의 발에 엎드려 입을 맞추고, 아무도 가까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병자들을 끌어 안으며 낮은 곳으로 몸소 임하심으로써, 권력을 가진 자들이 모든 이들의 위에 군림하며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섬기는 일을 해야 한다는 권력의 정의를 직접 실천하신 분입니다.
![]() |
| Credit: http://www.pinterest.com/ |
저희 아이들은 자신의 재능을 재분배하는 사람으로 커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저부터 그것을 실천해야 하겠죠. 남들이 부러워하는 재능을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그 책임은 더욱 더 무거워지는 것 같습니다. 정의로운 사회, 모든 인간이 그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땅에서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렵니다.
----------------
[1] YOUCAT #331
[2] http://www.mercurynews.com/bay-area-news/ci_27066589/jungle-san-jose-shuts-down-notorious-homeless-encampment
[3] YOUCAT #329
[4] http://www.foryourmarriage.org/the-common-good-a-call-to-charity-and-justice/
[5] http://www.bbc.com/news/world-21443313
Tuesday, March 22, 2016
Day #41: Open - 0부터 무한대까지
며칠전에 뭘 검색하다가 여기까지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2016년 1월 15일에 교황님이 하셨다는 강론 페이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조만간 "Open"이란 주제에 대해서 일기를 써야 하는 줄 알고 있었기에, 강론 주제에 "Closed Heart"라는 말이 눈에 띄어서 아마도 오픈이란 말이 나오겠지 싶어 북마크를 해 두었다가 오늘 다시 열어서 "open"이라는 단어부터 열심히 찾아보았습니다.
그 다음 질문은 아프리카 대륙의 나라수는 모두 몇개? 였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글을 읽고 계신 분들도 한번 하한값과 상한값을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17-30개, 다른 사람은 0-24개라 하더군요.
![]() |
| Credit: https://zenit.org/articles/popes-morning-homily-you-cant-have-a-closed-heart-if-you-want-to-understand-jesus/ (링크를 클릭하시면 교황님의 강론 내용을 영어로 보실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이, 제목에는 "예수님을 알고 싶으면 마음이 닫혀 있어서는 안된다"라고 되어 있어서 분명 내용 어딘가에는 '마음을 열어라' 하는 표현이 나올 줄 알았는데, 정작 '연다'는 표현은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소제목은 있었습니다만...).
그래서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어보았습니다. '닫힌 마음'에 반대되는 표현들이 '열린 마음'이란 말 대신에 '용감하고 진취적인', '용서와 겸손의 길을 따르는', '어떠한 위험도 감수하는' 등 여러가지 다른 식으로 표현이 되어 있더군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역시 뭔가 다른 분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교에서는 추상적인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사랑, 믿음, 정의, 행복, 자비, 환희, 은총, 구원, ... '마음이 닫히다', '마음을 열다' 이런 식의 표현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런데 이런 추상적인 표현들은 말 그대로 추상적이어서,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좀 막연하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그냥 뭐 좋은 얘기처럼 들리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이런 추상적인 개념들을 자신이 현실 생활에서 실제로 행동으로 말로 옮겨낼 수 있도록 구체적인 언어와 행동 지침으로 표현해 낼 수 없으면 그냥 뜬구름일 뿐이고 하느님은 그냥 저기 높이 먼 나라에 계신채 나랑은 상관없는 분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추상적인 개념들을 현실 생활에서 구현해 낼 '방법론'이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생각이 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황님은 예수님을 알고 싶다면 '마음을 열어라'가 아니라, '어떠한 위험도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용감하고 진취적인 마음을 가져라 '과 같은 식으로 우리에게 좀 더 와 닿는 표현들을 사용하고 계시는 군요.
그리고 교황님은 계속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병을 치유해 주고 기적을 행하는 자로서 받아들이기 시작했지만, 예수님은 한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만이 할 수 있다고 믿어왔던 '죄의 용서'를 해 주심으로써 사람들은 신성 모독이라 생각하여 등을 돌리기 시작하였고, 거기서 훨씬 더 나아가 자신의 살을 먹어야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심으로서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게 되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신의 살을 먹어야 우리가 산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성과 기존의 관념에 도전하여('위험을 감수'하고) 그것을 무너뜨리고 한걸음 나아가는 (용감하고 진취적인) 마음이 진정으로 필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교황님이 말씀하신 '닫혀진 마음'을 갖지 말라는 것은 결국, 자신이 그제껏 알고 있던 상식과 지식의 벽을 무너뜨리는 용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전에 보았던 내셔널 지오그래픽사의 Brain Games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이 납니다. 최첨단의 신경 심리학 (neuropsychology)에 나오는 여러가지 흥미로운 개념들을 게임 형식으로 제공해서 시청자들이 재미있게 심리학 개념들을 배울 수 있게 만든 다큐멘터리랍니다. 그 중에서 What You Don't Know라는 에피소드(Season 2 Episode 6)를 보면 길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간단한 실험을 하는데, 그것은 정답이 속할 것 같은 범위(하한값과 상한값)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첫번째 질문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책의 수는 모두 몇개인가? 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10-15개, 또 다른 사람은 7-25개라고 하더군요.
(정답은 46개. Brain Games에서는 개신교의 분류인 39개를 답으로 하였지만, 그냥 저는 가톨릭 버전으로 가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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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ain Games Season 2 Episode 6 - What You Don't Know (National Geographics, May 13, 2013) |
(정답은 57개랍니다)
그 다음 질문은 미시시피 강의 길이는 몇 마일? 이었습니다. 미시시피 강은 미국에서 제일 긴 강이라고 하죠. 여러분도 한번 하한값과 상한값을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은 20-400을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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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ain Games Season 2 Episode 6 - What You Don't Know (National Geographics, May 13, 2013) |
(정답은 2350 마일이랍니다.)
그 다음 질문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사망했을 때의 나이는? 이었는데, 어떤 사람은 45-60라 하더군요.
(정답은 39살이랍니다.)
어떠셨어요? 정답이 생각하신 범위 안에 잘 들어오시던가요?
이 게임은 '과신(過信) 효과(Overconfidence)'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게임이었습니다. 우리의 두뇌 속에서는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격렬한 전쟁이 맨 순간 벌어지고 있는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잘 모른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하는 기작이 있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하자면, 잘 모르는데도 무의식 중에 아는척 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실험 대상의 79%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답을 모르면서도 계속해서 아주 좁은 범위의 숫자를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라고 합니다.
근데, 이 게임이 교황님이 말씀하신 "열린"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구요?
그것은 위에서 얘기했던대로,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아가기 위하여 두뇌에서 이미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과신 효과'를 극복한다는 것은 "자신이 그제껏 알고 있던 상식과 지식의 벽을 무너뜨리는 용기"와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 다큐멘터리의 범위 맞추기 게임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처음에는 아주 좁은 범위의 숫자만을 부르다가, 게임이 거듭될 수록 범위를 점점 넓히는 전략으로 바꾸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나중에는 하한값은 0, 상한값은 몇천 이런식으로 아주 범위를 크게 불러서 나오는 문제마다 정답이 그 범위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변하더라는 점이었습니다.
이 게임에 참여했던 사람들처럼 우리도 이런 방법으로 마음을 열어 예수님을 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과신 효과'에 빠지지 않도록, 예수님의 범위를 자꾸 넓혀가면 되겠죠.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오류처럼 우리의 상식과 지식으로 소화되는 치유자의 모습을 상한값으로 주지 말고,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라는 상한값으로, 아니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더 큰 상한값으로 자꾸 범위를 넓혀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아가는 게임에서 백전백승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한값은 0부터 상한값은 무한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무것도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무한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Sunday, March 20, 2016
Day #40: Palms - 우리가 떠난 자리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가지 주일입니다. 성당에 들어서니 고운 보라색 리본으로 장식한 바구니에 축성된 성 가지가 가득 담겨 주인을 기다리고 있네요.
사람들은 손에 성 가지를 들고, 다른 때와는 달리 성당 밖에서 줄을 지어 '호산나'를 부르며 성당 안으로 입장을 합니다.
제대도 성 가지로 아름답게 장식되고, 오늘은 십자가도 성 가지를 멋지게 입고 있습니다.
오늘은 미사 중에, 성 가지를 흔들며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던 저희들이 한순간에 돌아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소리지르며 함께 긴 복음을 함께 하며 무릎을 꿇고 주님의 죽음을 숙연하게 묵상하는, 굉장히 특별한 미사입니다.
미사가 끝나면 사람들은 성 가지를 집으로 가지고 갔다가 내년 재의 수요일이 되기 전에 성당으로 다시 가져오고, 그 성 가지들은 재의 수요일에 저희 이마에 얹혀질 재가 되지요.
저는 몇년전부터 이 주님 수난 성지 가지 주일이 되면 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미사가 끝나고 난 뒤 바닥에 버려진 성 가지들을 줍는 일입니다.
3년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성당을 나서는데 우연히 발밑에 떨어진 성 가지를 보았습니다. 미사 중에 지루했던 누군가가 마치 손장난이라도 쳤던 것같이 심하게 훼손된 성 가지가 눈에 거슬려 일단은 주워들었었지요. 그러고 몇걸음 지나가는데 바닥에 떨어져 있는 성 가지들이 계속 눈에 뜨이더군요.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찬찬히 둘러보니 상당히 많은 성 가지들이 성당 안에 내버려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축성된 건데 이걸 이렇게 버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싶어 그때부터 성 가지를 줍기 시작한 것이 올해까지 계속 되는군요.
그동안은 줍기만 하다가, 오늘은 사진을 좀 찍었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었으면 좀 자세히 살펴보고 사진도 더 많이 찍을 수 있었을텐데, 9시 30분에 성당 도착에서 3시경에 나올때까지 미사도 못보고 화장실도 못가고 점심도 못먹고 주일 학교 간식 준비와 보강 수업과 부엌 설겆이만 하다가 나와서 미사는 결국 동네 성당에서 저녁 시간에 갔어야 할 정도로 바쁜 날이어서, 그냥 슬쩍 지나가면서 눈에 들어오는 것만 찍었는데도 오늘도 건진 게 상당히 많습니다.
떠난 자리가 아름다운 사람이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라 했던가요? 우리는 정말 아름다운 사람인가요?
사람들은 손에 성 가지를 들고, 다른 때와는 달리 성당 밖에서 줄을 지어 '호산나'를 부르며 성당 안으로 입장을 합니다.
제대도 성 가지로 아름답게 장식되고, 오늘은 십자가도 성 가지를 멋지게 입고 있습니다.
오늘은 미사 중에, 성 가지를 흔들며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던 저희들이 한순간에 돌아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소리지르며 함께 긴 복음을 함께 하며 무릎을 꿇고 주님의 죽음을 숙연하게 묵상하는, 굉장히 특별한 미사입니다.
미사가 끝나면 사람들은 성 가지를 집으로 가지고 갔다가 내년 재의 수요일이 되기 전에 성당으로 다시 가져오고, 그 성 가지들은 재의 수요일에 저희 이마에 얹혀질 재가 되지요.
저는 몇년전부터 이 주님 수난 성지 가지 주일이 되면 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미사가 끝나고 난 뒤 바닥에 버려진 성 가지들을 줍는 일입니다.
3년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성당을 나서는데 우연히 발밑에 떨어진 성 가지를 보았습니다. 미사 중에 지루했던 누군가가 마치 손장난이라도 쳤던 것같이 심하게 훼손된 성 가지가 눈에 거슬려 일단은 주워들었었지요. 그러고 몇걸음 지나가는데 바닥에 떨어져 있는 성 가지들이 계속 눈에 뜨이더군요.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찬찬히 둘러보니 상당히 많은 성 가지들이 성당 안에 내버려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축성된 건데 이걸 이렇게 버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싶어 그때부터 성 가지를 줍기 시작한 것이 올해까지 계속 되는군요.
그동안은 줍기만 하다가, 오늘은 사진을 좀 찍었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었으면 좀 자세히 살펴보고 사진도 더 많이 찍을 수 있었을텐데, 9시 30분에 성당 도착에서 3시경에 나올때까지 미사도 못보고 화장실도 못가고 점심도 못먹고 주일 학교 간식 준비와 보강 수업과 부엌 설겆이만 하다가 나와서 미사는 결국 동네 성당에서 저녁 시간에 갔어야 할 정도로 바쁜 날이어서, 그냥 슬쩍 지나가면서 눈에 들어오는 것만 찍었는데도 오늘도 건진 게 상당히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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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발에 걸리는 것들만 수거해 왔습니다 |
떠난 자리가 아름다운 사람이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라 했던가요? 우리는 정말 아름다운 사람인가요?
Saturday, March 19, 2016
Day #39: Red - 예수님의 수난을 생각하며...
어제 우연히 성 요셉 성당 앞을 지나가다가, 십자가가 다른 색의 옷을 걸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수난을 상징하는 붉은 색을 내일부터나 볼 수 있으려나 생각했는데, 벌써 붉은 색으로 바뀌어 있네요. 아마도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기리던 수난절 형식 (부활절로부터 2주전) 을 따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내일부터는 일년중의 가장 중요한 한 주간인 성주간(Holy Week)이 시작됩니다. 오늘은 '숨은 빨강 찾기' 대신에 붉은 색을 통해 상기되는 예수님의 수난을 생각하며 다음 한 주를 시작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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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 Joseph 성당: 3월 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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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 Joseph 성당: 오늘 3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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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 Joseph 성당: 3월 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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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 Joseph 성당: 오늘 3월 19일 |
주님의 수난을 상징하는 붉은 색을 내일부터나 볼 수 있으려나 생각했는데, 벌써 붉은 색으로 바뀌어 있네요. 아마도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기리던 수난절 형식 (부활절로부터 2주전) 을 따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내일부터는 일년중의 가장 중요한 한 주간인 성주간(Holy Week)이 시작됩니다. 오늘은 '숨은 빨강 찾기' 대신에 붉은 색을 통해 상기되는 예수님의 수난을 생각하며 다음 한 주를 시작하렵니다.
Friday, March 18, 2016
Day #38: Loved One - 아나킨과 파드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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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킨, 난 당신의 사랑만 있으면 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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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만으로는 당신을 구할 수 없어요, 파드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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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킨: 나의 새로운 능력만이 당신을 구할 수 있어요. 파드메: 어떤 댓가를 치르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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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좋은 사람이예요. 이러지 말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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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다 당신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오.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
스타워즈의 2편에 보면, 아니킨이 파드메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다이의 삶에 있어서) 집착(attachment)은 금지되어 있어요. 소유도 금지되어 있죠. 제가 조건없는 사랑이라 정의하는 깊은 공감(compassion)은 제다이 삶의 중심이예요. 그러니까, 제다이들도 사랑을 하도록 권장된다고 말할 수 있죠."
아나킨이 이미 머리로는 알고 있었던 "제다이는 집착하지 않음"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실천으로 옮겨낼 수 있었다면, 자신을 행복에서 멀어지게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사랑하는 파드메도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송봉모 신부님은, 아흔 아홉살이 넘어 귀하게 얻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고 그와 함께 모리야 산을 오르는 아브라함의 여정에 대한 책, "순례자 아브라함 - 모리야 산으로 가는 길"(바오로딸, 2014년. p.222-223)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에게 이사악은 무엇인가? 하느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 내가 최고로 여기는 것, 그래서 그분이 요구하실때 내놓기가 힘든 것은 무엇일까? 사랑하는 자녀? 사랑하는 사람? 지금까지 심혈을 기울여 온 사업? 유명 대학에서 받은 학위? 피땀 흘려 모은 재산? 현재 누리고 있는 명예나 권력, 아니면 자기애로 똘똘 뭉친 에고(자아)?
(중략)
다시 한번 자문해 보자. 무엇이 이사악인가? 그것이 무엇이든 내 것이라 생각하는 태도가 이사악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내 것이라 간주한다면, 언제 하느님이 그것을 갖고 가실지 몰라 두려울 수 밖에 없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에게 애착하다가 모리야 시험을 당한 것처럼 내가 애착하는 것을 하느님이 언제 다시 달라고 할지 몰라 전전긍긍할 수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이라는 점을 철저히 인정하면 아파하거나 힘들어 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다. 토저는 이렇게 말한다.
"형제자매들이여, 여러분에게 소중한 것이 있는가? 그러면 그것에 칼을 꽂아서 죽여라. 그것과 함께 죽어라. 그러면 하느님이 그것과 당신을 모두 다시 살리실 것이며, 여러분에게 돌려주실 것이다. 하지만 그때부터 그것은 더 이상 여러분 안에 있지 않고 여러분 밖에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여러분 안에 있을때는 여러분의 마음을 짓눌렀겠지만 지금은 여러분 밖에 있기에, 여러분은 그것을 통해 하느님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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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악의 희생 (렘브란트) Credit: https://bibleartists.files.wordpress.com/ |
아나킨이 파드메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이 이렇게 비극적인 모순으로 치달은 것은, 사랑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랑하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나킨은 파드메를 사랑했지만, 그녀를 위하여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더욱 사랑한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들께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가족일 수도 있고 특별한 친구들일 수도 있겠지요. 분명 그들을 사랑하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그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는지요? 그들이 여러분 곁을 떠나려고 할때, 그냥 가도록 놓아주시겠습니까? 아니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붙잡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들을 위해서 사랑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들을 사랑하는 당신을 위하여 사랑하고 계십니까?
Thursday, March 17, 2016
Day #37: Clover - 삼위 일체
어느 노예 소년의 비밀 무기
원문: The Secret Weapon of a Teenage Slave (by Christina Mead)
| Credit: http://www.lifeteen.com/ |
지금부터 옛날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준비 되셨나요?
옛날 옛날에 15세의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행복했고 젊고 자유로왔으며, “종교”라든지 “하느님”이라든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별로 관심도 없고 신경쓰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크리스쳔이었지만, 그에게 별로 신앙에 대해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해적에 의해서 납치됨과 동시에 그렇게 근심걱정 없던 그의 삶은 한순간에 바뀌고 말았습니다.
해적들은 이 소년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노예로 다른 나라에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노예의 신분으로, 어느 부유한 이교도의 양을 쳐야만 했습니다.
그때 그는 1) 10대 소년이었고, 2) 강제로 집을 떠나야 했으며, 3) 다른 나라에서 완전히 홀홀단신이었고, 4) 노예 양치기로서 양을 돌보느라 밤낮으로 들판에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이래도 대학 입시가 정말 힘들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진짜로, 이 소년의 상황이 어떨런지 상상이 가시나요? 당신은 어떻게 하셨을 것 같은가요? 저라면 울었을 겁니다. 그리고 나무가지들을 부러뜨리고 돌을 집어 던졌을 겁니다. 그리고 외로움과 슬픔과 지루함에 못 이겨 더 크게 울었을 겁니다. 들판에 저 혼자 밖에 없었을테니까요…
이 소년은 무엇을 했을까요? 만약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상황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들판에서 멍청한 양들과 수년동안을 고립되어 지내야만 할때, 무엇이 당신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유지할 수 있게 할까요? 아마도 당신은 비밀 무기가 필요할 겁니다.
이 소년은 뭔가 한가지를 발견했습니다.
양치기로 보내야만 했던 6년동안, 그는 하느님과 강력한 만남을 체험할 수 있었고, 그 체험은 그에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자기 연민에 빠져 허덕이는 대신에,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대화하는데 시간을 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고립되었다고 느끼는 대신에, 자신을 온통 둘러싸고 있는 하느님의 현존을 자신에게 상기시키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를 둘러싼 이교도의 문화가 그를 짓누르게 내버려 두지 않고, 구세사에서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하신 일들의 영광속에 살았습니다.
이것들이 그가 한 선택이었고, 이러한 그의 선택은 정말 끔찍했던 자신의 경험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그가 결국 도망쳐 그의 고향으로 돌아간 다음, 그는 사제가 되었고, 자신이 노예 살이를 하며 모셔야 했던 민족들이 있던 그 나라로 다시 찾아갔습니다. 세상에 누가 그런일을 할까요?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회개한 사람, 이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나중에 주교가 되었으며, 그 나라의 주보 성인이 되었습니다. 바로 아일랜드죠.
정말 힘겨운 상황을 겪었던 10대 소년으로서, 그분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정말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성인(聖人)이 된다는 것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덕을 실천하기로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하느님의 현존의 실제과 우리에게 열려져 있는 모든 천사들과 성인들의 힘 속에서 우리가 매일을 살아간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 파트리치오의 비밀 병기는 당신 것이기도 합니다. 가끔씩은 외롭고 고립된 것처럼 느껴지
십니까? 완전 “깨졌다”고, 혹은 세상이 당신을 완전히 “잡을” 것 같이 느껴지십니까? 당신이 불쌍하다고 느껴지십니까?
성 파트리치오는 기도를 여기 밑에 옮겨왔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문을 통해 그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가 매일 아침 이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요. 만약 당신이 하루를 이와 같이 시작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하루가 “세상과 나의 전쟁”인 것처럼 느껴질 수가 있겠습니까?
이건 비밀인데요: 하느님의 모든 것, 그리고 그분이 하신 모든 일은 모두 다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헛되지 않게 하십시요. 당신은 기도를 통하여 모든 순간, 모든 시련, 모든 몸부림, 모든 고통을 살아낼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행하신 모든 선(善)과의 일치 안에서… 모든 은총은 당신에게 열려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한 순간에,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더이상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당신이 하느님을 위한 삶을 살기로 선택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충만하고 기쁨 넘치는 삶이 보장됩니다.
성 파트리치오 주교님이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요...
성 파트리치오의 찬송 (The Lorica of St. Patrick) [1]
나는 오늘을 시작합니다.
창조의 창조주의
전능하신 힘, 삼위일체에의 기도를 통해서,
세분이심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하나이심의 고백을 통해서.
나는 오늘을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분의 세례의 힘을 통해서,
그분의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그분의 묻히심의 힘을 통해서,
그분의 부활과 승천의 힘을 통해서,
그분이 마지막 날 강림의 힘을 통해서.
나는 오늘을 시작합니다.
케루빔의 사랑의 힘을 통하여,
천사들의 순종 안에서,
대천사들의 섬김 안에서,
부활하여 상을 받으리라는 희망 안에서,
대주교들의 기도 안에서,
사도들의 가르침 안에서,
죄를 고백하는 자들의 믿음 안에서,
동정을 간직한 이들의 순수함 안에서,
올바른 사람들의 행위 안에서.
나는 오늘을 시작합니다.
천국의 힘을 통하여;
태양의 빛,
불의 광채,
번개의 빠름,
바람의 민첩함,
바다의 깊이,
지구의 안정감,
바위의 단단함.
나는 오늘을 시작합니다.
나를 움직이시는 하느님의 힘을 통해서;
나를 떠받치시는 하느님의 전능,
나를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지혜,
나의 앞을 내다보시는 하느님의 눈,
나를 들으시는 하느님의 귀,
나를 위해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
나를 지키시는 하느님의 손,
나의 앞에 펼쳐진 하느님의 길,
나를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방패,
나를 구하시는 하느님의 성체
사탄의 덫으로부터,
타락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해치고자 하는 모든 이로부터,
멀리서도 가까이에서도,
홀로 있어도 무리지어 있어도...
나는 오늘 저와 악 사이에 이 모든 권능을 불러 모읍니다.
나의 몸과 영혼을 억누르는 잔혹하고 무자비한 모든 권력에 대항하여,
거짓 예언자들의 주술에 대항하여,
이교도들의 어두운 법에 대항하여,
이단자들의 거짓 법에 대항하여,
우상화의 기교에 대항하여,
여인들과 세공인들과 마법사들의 주문에 대항하여,
인간의 몸과 영혼을 망가뜨리는 모든 지식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여 오늘 나를 지켜 주소서.
독약으로부터, 불에 데임으로부터,
물에 빠짐으로부터, 상처로부터,
그리고 상이 나에게 넘치게 내려질 수 있도록.
그리스도 나와 함께 계시고,
그리스도 내 앞에 계시고,
그리스도 내 뒤에 계시고,
그리스도 내 안에 계시고,
그리스도 내 아래에 계시고,
그리스도 내 위에 계시고,
그리스도 내 오른편에 계시고,
그리스도 내 왼편에 계시고,
그리스도 내가 누웠을때 계시고,
그리스도 내가 앉았을때 계시고,
그리스도 나를 생각하는 모든 이의 마음에 계시고,
그리스도 나를 말하는 모든 이의 입에 계시고,
그리스도 나를 보는 모든 이의 눈에 계시고,
그리스도 나를 듣는 모든 이의 귀에 계시도다.
나는 오늘을 시작합니다.
창조의 창조주의
전능하신 힘, 삼위일체에의 기도를 통해서,
세분이심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하나이심의 고백을 통해서.
St. Patrick (ca. 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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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St. Patrick Day였습니다. 그동안 이날만 되면 아이들 학교에 초록색 옷을 입혀보내라해서 도대체 뭔날인데 이날은 초록색 옷을 입는 건가 했었는데, 작년에 위에 제가 옮겨온 블로그 글을 보고서야 왜들 이렇게 이 날만 되면 야단법석을 떠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은 많이 알고 계실거라 생각은 하지만, 혹시 모르고 계신 분들을 위해서 이 글을 옮겨왔습니다. 원문은 미국의 대표적인 청소년 사목 단체 Life Teen의 웹사이트에 게재된 블로그, The Secret Weapon of a Teenage Slave (Christina Mead) 인데, 그것을 직접 번역하고 약간 편집하였습니다.
발렌타인만큼 상업적이진 않아도, 오늘만큼은 초록색 옷을 입고 저녁에는 아이리쉬 선술집에 모여서 이날을 기념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학교도 선생님도 학생들도 초록색이 들어간 뭔가를 입고 나타났지요 . 저도 옷 중에서 가장 초로스름한 것을 골라입고 갔으니까요. 저희 학급의 담임 선생님의 옷차림은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을 정도였답니다.
학교에서는 하루 수업 시간의 절반을 St. Patrick Day와 연관된 내용으로 수업을 하였습니다. 상술로 얼룩진 발렌타인과는 달리 St. Patrick Day는 이교도의 개종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 성인의 정신을 제대로 기리는 날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 |
| (담임 선생님이 제게도 St. Patrick Day 색칠 공부라도 하라며 한 묶음 주시더군요) |
사순 일기의 주제가 '클로버'인 오늘이 되기 벌써 며칠전부터 운동장에 나가게 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클로버 풀밭에서 열심히 네잎 클로버를 찾아 보았습니다. 혹시라도 찾게 되면 사진도 찍고 오늘 사순 일기에 쓸거리도 있을 것 같아서였죠. 봐야할 학생은 보지도 않고 열심히 풀밭만 들여다보고 다녔지만, 네잎 클로버를 찾지는 못하였습니다.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게 있어서 그랬는지 살짝 실망도 되더군요.
그렇지만, 오늘 St. Patrick에 대한 정보를 찾던 중에, 그분이 세잎 클로버를 가지고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했다는 이야기를 읽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한분이시지만 세분이시고, 세분이지만 한분이신 삼위일체의 신비가 운동장 잔디밭에 펼쳐져 있었음을 그동안은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운동장에 나가 클로버를 보게 되면 밟지도 못하겠고 살짝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옮겨 갑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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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 패트릭의 찬송 7절(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80)'을 참조하여 필자 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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