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December 16, 2014

기다림의 계절

대림은 기다림의 계절...

이마에 재를 얹는다, 금식을 한다, 극기를 한다 등등 "비장"한 각오로 맞이하는 사순과는 달리, 대림은 늘 조용히, 아니 좀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아이들 선생님, 친구, 친지들에게 드릴 크리스마스 선물 쇼핑을 하느라고 늘 정신없이 보내왔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올해의 대림은 시험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뭔가 빠뜨린 것 같은데...'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조용하게 지나가고 있네요.

그런데 이번 대림에는, 대림환에 초가 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제 마음을 조금씩 더 환하게 해 주는 일들이 생기고 있어서, 시험 공부를 하고 있어야 할 이 시간에 다시 몇자 끄적거리게 되는군요.

대림환이 세워진 첫주 주일의 다음날인 월요일날, 차를 타고 어디를 다녀오는 길에 큰 아이가 뜬금없이 제게 물었습니다.

철수: "What was it again?"
지아나: "뭐?"
철수: "Lent thing-y?"
지아나: "아... Advent(대림)!"
철수: "(영어로) 좋아하는 일본 에니메이션을 일주일에 3시간만 보고 싶어"
지아나: "너 벌써 일주일에 3시간도 더 넘게 보고 있쟎아?"
철수: "(역시 영어로) 그러니까, 3시간만 보겠다고... 더보고 싶은데 3시간만 보겠다고..."

그제서야 이 녀석이, 오랜만에 자색 제의를 입고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님을 보고는, 신부님이 저런색 옷을 입고 있을때는 뭔가 희생하고 극기하고 그런게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뭔가를 포기하고 극기하는 건 사순에 주로 하고 대림시기에는 꼭 하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해 주었더니, "Really?" 하더니 '휴~~'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더군요. 그 안도의 한숨을 쉬는 녀석의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희생할 것인지 나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고 그것이 자신에게는 그리 쉬운 결정은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지난 사순이 생각나더군요.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무언가를 조금만 포기해 보자고 했을때 질색 팔색을 하며 씨알도 먹히지 않던 아이였는데...

운전하며 집에 돌아오는 내내 제 얼굴에는 미소가 피어 올랐습니다.

대림환의 두번째 초에 촛불이 켜지던 날, 처음보는 신부님이 방문 오셔서 미사를 집전해 주셨습니다. 이 신부님이 강론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과 같이 많은 시간을 보내고 또 그러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말로만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하지 말고 사랑하는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그러시면서, 자신이 맡고 있는 본당에서는 하루에 적어도 15분은 시간을 내어 그분과 함께 보낼 것을 아주 강조하고 있다고... 여러분들도 이제부터 그렇게 해 보시라고...

그 얘기를 듣자 귀가 번쩍 띄었습니다. 평소에 그러한 필요성을 많이 느껴왔던 터여서, 어떻게하면 아이들이 큰 거부감없이 하느님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거든요.

그날 저녁, 샤워하고 나오는 아이들을 붙잡아 "오늘 신부님하시는 말씀 들었지?" 하고는 각자 방으로 밀어넣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나 잠들거야" 하며 분위기잡는 조명도 못하게 하고 어떻게든 시간을 줄여보려고 잔머리를 굴리는 큰 녀석에게는, "그럼 내년부터는 15분으로 하는 거야" 하고 단단히 약속을 받아내고는 5분을 깎아주어야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해서 오랫동안 생각만 하고 있었던 큰 숙제 하나를 단박에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그치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10분 동안 방에 들어가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문을 열어볼 수도 없고 물어볼 수도 없고...

그래서 얼마전부터는 10대 청소년을 위한 부담없는묵상 자료를 프린트해서 방에 두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읽으려나 싶었는데, 그래도 스테이플한 자리에 종이가 접힌 흔적도 있고, 어떤 날은 방에서 나온 직후에 식사전 기도를 진지하게 하는 걸 보면 들여다 보기는 하는가 봅니다.

지난 주일에는 분홍색 초에 불이 켜졌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사무실 옆 조그만 방 앞으로 몇명의 아이들이 줄 지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 주중에 있는 판공 성사를 볼 수 없는 학생들은 미사 끝나고 고해 성사를 해 주시겠다고 공지를 하시던데, 여기서 하시나 보구나'

그런데, 그 아이들 사이에 서 있는 큰 아이가 눈에 띄었습니다. 이번에는 성당에서 단체로 하는 판공에 참석할 수가 없어, 따로 고해 성사 보러 가자하면 엄청 궁시렁 거릴게 뻔한데 어떻게 구슬러서 데려 가야 하나 하고 고민이 많았던 터인지라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주일 학교도 다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물었습니다.

지아나: "너 아까 고해 성사했니?"
철수: "응"
지아나" "왜 했어?"
철수: "고해 성사할 시간(기회) 없어서..."
지아나: "주일 학교 학생들은 이번 주중에 판공해야하는 거 알고 있었어?"
철수: "응"
지아나: "근데 우리는 그때 갈 수 없는 것도 알고 있었어?"
철수: "응"
지아나: "그래서 미리 오늘 한거야?"
철수: "응"

하마터면 '양심 성찰은 제대로 하고 고해 성사를 보긴 한거냐?' 하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었는데 잘 참았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잘했다"고 마구마구 칭찬을 해 주었지요...

엄마가 지 좋으라고 하는 말과 행동이 오히려 역효과가 되어 버리는 틴에이저가 되어 버린 큰 아이... 올해부터 가톨릭 사립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신앙과 일상이 하나가 되어버리는 생활을 하고 있는 작은 아이와는 달리, 아직도 갈 일은 멀지만 엄마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늘 조바심이 나게 했던 큰 아이... 덩치는 어른만해도 신앙인으로서는 늘 갓난아이인 것만 같았던 그 아이가 어느새 이만큼 훌쩍 자라있음을 보게 되면서, 커다란 크리스마스 선물을 미리 땡겨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제 며칠 있으면 대림환의 마지막 초에 불이 켜 집니다. 이번에도 촛불에 불이 밝혀지면 뭔가 깜짝 놀랄 선물이 있지나 않을까 싶어 이번 주일이 많이 기다려지네요.

기다림의 계절, 대림이라서 더 그런 걸까요?

Tuesday, November 25, 2014

지아나는 지금...

제 블로그를 보시는 분들 모두 아마도 '지아나'라는 이름이 생소하실 거란 생각이 듭니다. 어떤 분들은 왜 지아나냐고 물으시기도 하지만, 묻지 않는 분들도 계시네요.

'지아나'는 제가 Nursing School 다니는 동안 붙었던 별명입니다. 미국 사람들에게는 그리 쉽지 않은 한국 이름 대신에 쉽게 부를 수 있는 영어 이름을 만들어 보기도 했었지만, 과 친구들이나 실습 조교들은 굳이 제 원래의 이름을 불러주려고 노력을 많이 하더군요. 어느 실습 조교가 제 이름을 부르는데, 그 사람 특유의 액센트 때문에 "지안~나" "지안~나" 하며 부르는 것이 재미있어, 과 친구들이 그 사람의 액센트를 흉내내며 저를 "지안~나" "지안~나" 하며 부르면서 '지아나'가 제 별명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꾸 듣다 보니까 한국식으로도 "영희야~"하고 부를때처럼 제 이름을 부르면 '지아나' 같이 들리는 것 같아 진짜 제 이름같다는 생각도 들고, 단 8시간의 시프트 동안 만나게 되는 환자들에게도 기억하기 쉽고, 스타벅스에서 이름을 물어봐도 이 이름을 대면 굳이 스펠링까지 불러주어야 하는 번거로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이 이름을 제 영어 이름으로 쓰기 시작했지요. 여기 블로그에도 제 이름 대신 이 이름을 쓰게 되는 군요.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

또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제가 간호사 자격증 시험 준비 중입니다. 만만한 시험이 아닌지라 한동안은 속세와 인연을 끊고 공부에 전념해야 할 것 같아서, 당분간은 블로그도 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동안 글이 올라오지 않더라도 걱정하지 마시고 가끔 생각나면 맘속으로 응원 부탁드립니다.

다음 번 글에는 좋은 소식과 함께 인사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조만간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Monday, November 17, 2014

"8월의 크리스마스" - 4분의 4

그렇게 해서, 교황님이 이번 여름에 방한하실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 순간부터 그렇게 바라고 나름 준비해왔던 시복식에 가 보지 못 했습니다. 아쉬움은 컸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군요. 아마도 나름대로 제가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남기지 않고 다 시도해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순조롭게 시복식 미사 참석을 신청하여 티켓을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신청서 제출하고 나서 룰루랄라하고 있다가 티켓 받아가라는 공지가 나오기가 무섭게 줄서서 받아 챙겨놓은 다음, 당일날 6시까지 푹 자고 지하철 타고 나가 경건한 마음으로 미사드리고 돌아왔겠죠. 인증샷 열심히 날리고, 혹시 운이 좋았다면 교황님 사진 하나 건졌을테구요. 그리고나서 카톡이나 페북에 사진 대문짝만하게 올려놓고 뿌듯해 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치만, 그렇게 해서 제게 남은 건 아마도 그 인증샷 몇장이 전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요?

"교황님은 마치 산타클로스처럼 저희한테 오셔서 너무너무 많은 선물을 주고 가셨어요. 크리스마스 같아요. 8월의 크리스마스..."

교황님의 방한 기간 중 3일간의 행보를 다룬 8월 24일자 KBS "다큐 3일 - 8월의 크리스마스"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어느 자매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 자매님은 과연 어떤 선물을 받았기에 그런 말씀을 하신 걸까요?

이 더운 한여름에 하얀 옷을 입고 나타난 산타클로스... 저는 과연 그분에게서 어떤 선물을 받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무도 오란 사람없던 시복식... 거기에 어떻게든 껴 보고 싶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노력을 계속 하면서, 이렇게까지 시복식에 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정말 무엇인지, 이것이 제게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보게 되었었지요. 제가 그토록 시복식에 가고 싶어했던 것은 결국, "그 유명인사를 가까이서 구경"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저 같은 사람이 언감생신 "구경"이라도 해 보겠다는 야무진 꿈을 꿀 수 있도록 그 "유명인사"가 어떻게 이렇게 "가까이" 오게 되었는지부터 스스로 따져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순교자들의 시성식이나 시복식을 바티칸이 아닌 그들의 나라에서 직접 하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것인데, 이번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한국에서 시복식을 하신 것 뿐만 아니라 25년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도 직접 한국을 방문하여 시성식을 하신 이유가, 그만큼 한국 천주교의 위상이 높기 때문이라는 것은 이미 매스컴 등을 통해 들어왔던 것이긴 했지만, 그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던 이유인 한국 천주교회의 탄생 과정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그 이유에 대해 스스로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삶의 뿌리와 진리를 탐구하던 젊은이들이 천주교 교리서를 통해 그 진리를 찾게 되고, 정답을 찾은 것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려는 노력을 통해 외부 선교사의 도움없이 스스로 종교의 싹을 틔워, 미사 성제와 성사 집행을 할 수 있도록 신부님을 보내 달라고 북경주교에게 밀사를 보내어 요청을 하는 과정에서 북경주교가 교황청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세상 어디에서도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자생적인 교회의 탄생으로 온 세상에 서프라이즈를 했던 한국 천주교... 이런 것들을 알아 가면서, 한국 천주교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단지 한가지 종교의 차원을 넘어서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책을 읽으면서도 진리를 알아보는 눈을 가지고 있는, 그리고 그 시대를 지배하는 사상에 굴하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의 신앙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용기를 가지고 있는 한민족의 우수성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둘째아이가 입고 있던 시복식 기념 티셔츠를 보고 "한국에 천주교 신자가 그렇게 많은줄 몰랐다"는 어느 백인 의사의 얘기에, '근데 그 천주교가 한국에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면 더 놀랄걸??' 하는 말을 해 주고 싶었던 제 자신의 변화가, 아마도 이 8월의 크리스마스에 받았던 가장 큰 선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 외에도, 교황님 개인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면서 그런분이 제 종교의 리더라는 사실에 정말 기쁘고 감사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에의 기억은 아직까지도 속이 울렁거리게 하는 큰 선물이었습니다.

"마치 산타클로스처럼 저희한테 오셔서" 생각지도 않은 많은 선물을 안겨주고 가신 분... '프란치스코 교황님'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물론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아마도 많은 분들이 그분의 새하얀 수단보다도 더 눈부시게 환한 미소를 떠올리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교황님이 한국에 도착했던 그 순간부터, 기대만큼 밝지 않던 그분의 얼굴로 인해 "한국의 더운 날씨로 인해 관절염이 도지셨나 부다", "일정이 너무 빡빡한 거 아니냐", "한국이 너무 상처가 많은 나라이다 보니 그 아픔이 너무 크게 느껴지나 보다" 하며 많은 추측들이 난무했었거든요.

원래 자주 웃지 않는 분인데 가끔씩 보이는 환한 미소가 사진에 담기고, 그런 모습이 미디어에 오르내리면서 우리에게는 그 환한 미소가 낯익게 되어 버린건지, 아니면 정말 무슨 이유가 있어서 잘 웃지 않으신 건지 저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큐 3일"에 등장했던 어느 자동차 노조의 노조원이,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해 기도해 달라", "우리나라의 통일을 위해 기도해 달라", 이것을 위해 기도해 달라, 저것을 위해 기도해 달라, ... 우리는 끊임없이 그분께 이거해 달라 저거해 달라하며 너무나도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이야기를 했을때 정말 가슴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분은 그 많은 요구를 단 하나도 거절하지 않으셨지요.

그 다큐멘터리에 보면, 교황님이 꽃동네를 방문하셨을 때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 사람 저 사람과 만나고 장애우들이 준비한 공연도 지켜 보십니다. 그런데 그 중, 지체 장애가 심해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장애우가 건넨 편지를 받고는 순간 환하게 밝아지는 그분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교황님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하네요. 그 순간 알았습니다.

교황님으로 선출된 직후 성 베드로 광장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그분으로부터 강복을 받고자 기다리던 군중들에게, "제가 여러분께 강복을 드리기 전에 여러분들이 저를 위해 강복해 주십시요" 하셨던 분, 한 종교의 최고 수장임에도 종교의 벽을 뛰어넘어 아무도 돌보지 않는 보잘것없는 이들의 발에 입을 맞추시는 분, 마피아의 돈세탁 창구로 공공연히 알려져있는 바티칸 은행에 개혁의 칼을 들이대신 분, 천주교 내부에서조차 어둠 속에서 숨죽이고 있는 동성애자들을 끌어안으시는 분... 그분이야말로 저희들의 기도가 정말 많이 필요한 분이시라는 것을...

산타클로스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몰래 굴뚝을 타고와서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고 갑니다. 미국에서는 그런 산타클로스를 위해 아이들이 쿠키와 우유를 준비해서 굴뚝 앞에 놓고 자러 들어가지요.

그날 이후로 저는 하얀 옷의 산타클로스를 위해 매일매일 쿠키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분을 위한 지향이 매일매일의 제 9일 기도에 추가되었거든요. 이제는 매일매일 크리스마스가 된 것 같네요. 비록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제 마음과 정성이 담긴 선물이랍니다. 제 기도가 그분께 닿아 매일매일 한번씩 더 환하게 미소지으시길...

메리 크리스마스, 파파!

Sunday, November 9, 2014

"8월의 크리스마스" - 4분의 3

[2014년 8월 15일 금요일]

오늘은 성모승천대축일인 관계로 미사를 봐야 했다. 가까운 동네 성당에 가려고 했던 계획은, 아침에 꾸물거리는 아이들로 인해 무산되고 결국은 조금 늦은 시간에도 미사를 볼 수 있는 명동 성당으로 바뀌게 되었다.

여늬때처럼 줄을 서서 기다려 입장했지만, 제대가 통 보이지도 않는 기둥뒤 밖에는 자리가 남아있지 않았다. 평소에 노래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어느 미사에 가더라도 성가대에 자꾸 눈이 가는 편인데, 예전과는 달리 제대옆의 성가대 자리가 비어있었다. '오늘은 성가대없이 미사를 하나?' 하고 있었는데, 미사가 시작되자 입당 성가가 윗층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른 때에 비해 훨씬 듣기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작부터 윗층에서 하지...'

그런데, 참회 예식이 끝나고 이어지는 대영광송의 신부님 선창이 심상치가 않다. 이제는 미사 중에 자주 사용되지 않는 라틴 전례 음악인 듯 싶었다. 따라 부를수가 없으니 듣는 수 밖에... 유니송과 화음, 남성과 여성의 목소리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가운데 라틴 전례 음악 특유의 무게와 느낌이 잘 살아나면서 코 끝에 마치 분향할 때의 향내음이 풍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독서에 이은 화답송, 알렐루야를 들으며 '아니, 명동 성당 성가대가 이렇게 노래를 잘 불렀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처음으로 주임 신부님의 강론을 들을 수도 있었다. 그동안 몇차례 명동 성당에서 주일 미사를 보긴 했지만, 강론은 항상 보좌 신부님이 하셨고 마지막 공지 시간에나 주임 신부님의 말씀을 몇마디 들을 수 있었는데, 그 몇마디 되지도 않는 말씀을 통해서도 그분의 내공이 심상치 않음은 그리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기에, 주임 신부님은 강론을 안 하시나 하고 궁금했던 참이었다.

강론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신앙고백과 성찬의 전례가 이어지면서, 사회자의 멘트가 나왔다. "봉헌 성가는 가톨릭 합창단에서 OOO(노래 제목 기억 안남 ㅠㅠ) 를 하겠습니다". '아... 가톨릭 합창단 이었구나. 프로들이겠네...'

너무나 아름다운 노래... 죽기 전에, 멋진 성당에서 정말 아름다운 음악 속에서 미사를 보고 싶은 바램이 있었다. 그래서 성탄절이 되면, 혹은 부활절이 되면 주교좌 성당에서 자정 미사를 드리고 싶은 생각이 늘 있었지만 실행에 옮긴 적은 없었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쌍투스는 그야 말로 압권이었다. 천사들의 합창이라는 표현을 접할 때가 있는데, 정말로 천사들이 합창을 한다면 저렇게 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안 그래도 눈물이 많은 나는 또다시 찔끔거리기 시작했다.

"성체 성가는 가톨릭 합창단에서 그레고리안 아베 마리아를 부르겠습니다." 다시 사회자의 멘트가 이어졌다. 노래만 듣고 있어도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성체를 모시고 났는데, 바로 옆자리의 자매님이 미사보 속으로 얼굴을 감추며 훌쩍거리는 게 보였다.

그러나 그날 미사의 정점은 천사들의 합창도 그레고리안 아베 마리아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파견 성가였다. 미사를 마치며 사회자의 멘트가 다시 이어졌다. "파견 성가는 애국가 1절과 2절을 부르시겠습니다." '애국가??' 하고 있는 순간, 전주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속이 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성가책을 내려놓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하며 노래를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한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면서 옆사람이랑 왠지 손이라도 잡아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앞의 앞 줄에 있던 어느 자매님은 연신 눈가의 눈물을 훔치기 시작하였고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를 노래할 때는 모든 이들이 배에다 있는대로 힘을 주고 목이 터져라 노래하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미사가 끝나고 성당을 나서는데, 마치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뜨거운 용광로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명동 성당에서 미사를 본 것이 채 다섯 손가락에도 꼽지 못할 정도이긴 하지만, "30년만에 첨으로 애국가 불러보는 거야" 하시는 어느 자매님 부터해서 그날은 성당문을 나서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다른 때와는 조금 달랐다.

'내가 바티칸에서 교황님과 함께 미사를 드린다해도 이런 미사는 두번 다시 없을거야.'

그러자 갑자기 교황님 생각이 다시 들었다. 미사 중간에 '이거 혹시 교황님께서 18일날 명동 성당에서 집전하시는 미사의 예행 연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어쩌면 그냥 대축일이라서 좀 특별하게 할 수도 있겠지 싶어 그냥 넘어 갔었다. 그런데 대축일이라고 해서 파견 성가를 애국가로 할 것 같지는 않았고, 몇십년 만에 처음으로 애국가를 불러본다는 어느 자매님 말씀이 자꾸 생각나면서 교황님 집전 미사 준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다시 들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니, 오늘의 이 미사가 마치 교황님이 이번 방한을 하면서 내게 주신 선물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구름 위를 걷는 기분으로 성당을 나섰지만, 교황님 방한에 대비해 쫙 깔린 전투 경찰과 각종 시위를 하는 그룹과 온갖 종류의 관광객들이 뒤섞여 명동 한복판은 그야말로 아우성이었다.

며칠 좀 선선하더니만 다시 기온이 올라 후덥지근한 날씨에 친구들 주고 싶다는 선물을 사기 위해 명동에서 인사동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콘서트 장으로 출발하기까지 약 30분 정도의 시간이 남게 되자 결국 나는, 아이들을 잠시 패스트푸드 점에 앉혀놓고는 다시 광화문으로 바쁜 발걸음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내가 찍어놓은 자리를 직접 한번 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미 광화문 주변은 차도를 도배하다 시피 한 경찰 버스와 인도에 진을 치고 있는 전투 경찰들, 세월호 유족에 관광객들까지 차도에는 차들이, 인도에는 사람들이 발 디딜 틈없이 말할 수 없이 복잡하였다. 직접가서 보니, 범죄 현장 같은데서 볼 수 있는 노란색 테이프의 폴리스 라인이 아니라, 플라스틱 통에 물을 채워 아예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었다. 바깥 쪽으로는 사람들 몇명이 걸어다닐만한 틈만 주고는 모든 인도의 한 가운데에 바리케이트를 만들고 있었다.

 


바리케이트를 따라 세종 문화 회관 계단 쪽으로 접근하다 보니, 괜챦아 보이는 조그만 골목길 모퉁이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자리를 잡는다고 했을때 누군가 와서 쫓아내지만 않으면 꽤 괜챦아 보이는 지점이었다. '역시 직접 와 보기를 잘 했어 ㅋㅋ'

계속 해서 세종 문화 회관 계단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커다란 안내 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가서 보니, 폴리스 라인 바깥 쪽에 설치될 이동식 화장실에 대한 안내 지도였다. 적어도 화장실이 급해도 갈 수 있는 데가 있겠구나 싶어서 마음이 더 놓였다. 시복식 정식 참석자외의 구경꾼들을 위한 배려 또한 감사하게 느껴졌다. 안내도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무슨 일급 기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온몸으로 저지하는 관계자 때문에 사진은 남길 수가 없었다.

막상 내가 찍어놓았던 세종 문화 회관 계단에 도착하고 보니, 계단의 어느 쪽에 앉아도 시야가 완전히 가려질 위치에 아주 높고 커다란 시설물이 설치되고 있었다. 여기 저기 눈에 보이는 다른 전광판과는 다른 구조물인 것이 느낌에는 중계 카메라가 설치될 것 같이 보이는 그런 구조물이었다. 그쪽 계단은 제대보다 높은 지대여서 어쩌면 저격수를 배치한다든지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안전 유지에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고 해서 일부러 그쪽 시야를 막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진짜 직접 와 보길 잘 했어. 안 와 봤으면 이런 게 여기 서 있을지 어떻게 알았겠어? ㅋㅋ'

이쯤 되고 보니, 원래 내가 1순위로 찍었었던 대한 민국 역사 박물관 건물 옆의 계단 자리도 직접 가서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치만 30분 남은 시간동안 헐레벌떡 뛰다 시피 하며 급히 돌아보았던 광화문 전경이었던 지라 그쪽까지 가기는 어려워서 바리케이트를 어떻게 치고 있는지 먼 발치에서 볼 수 밖에 없었다. 자세한 건 잘 보기가 어려웠지만, 얼핏 보기에는 계단까지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지는 않은 듯 싶었다. 그래서 내일 그 지점으로 무조건 가 보겠다 마음을 먹었다.

'아차... 이러다 콘서트에 늦겠다'

광화문에서 종로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가 (차가 더 막혀서 뛰는 게 더 빠른 상황이었음) 아이들을 데리고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으로 향했다. 콘서트 장을 많이 다녀본 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안내 표지가 없는 콘서트장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지하철 역에서 나오는 출구부터해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우왕 좌왕 하며 결국 자리까지 찾아가 앉고 나니, 완전히 기진맥진이었다.

그래도 처음엔 좀 앉아있으니 나아지는 듯 싶어서, 한동안 노래도 따라 부르고 사진도 찍고 소리도 지르고 하다가, 인제는 나이를 속일 수가 없는건지 어느 순간부터 몸이 늘어지기 시작하더니 하품이 계속 나오고 언제 집에 갈 수 있을까 시계만 보게 되었다.

5시에 시작한 콘서트... 늦어봐야 9시면 끝나지 않을까 싶었던 콘서트는 이게 왠 걸? 10시 30분이 넘어서야 끝이 났다.  너무 늦어진 것 같아 출연진들의 마지막 작별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뛰어 나왔지만, 출구도 제대로 열어 놓질 않아서 우리집 현관문 만한 게이트 사이로 콘서트장 구경꾼의 절반이 빠져나가야 했고, 각종 우여곡절 끝에 전철역 승강장에 도착하니 11시가 넘었다. 핫도그 한개로 저녁을 떼운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고 투덜댔지만 전철이 끊길까봐 뭘 사 먹으러 갈 수도 없었고, 그 야심한 시각에 콘서트 관중들로 콩나물 시루같이 빡빡해진 전철에 몸을 싣고는 막차에 막차를 거듭 타서 결국 집 근처 전철역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밤 12시는 훌쩍 넘어 있었다. 전철역 출입구의 셔터가 반쯤 내려와 있는 건 예전에 가끔씩 막차를 타 본 적이 있는 나조차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8월 16일 토요일, 드디어 시복식 카운트 다운]

* 새벽 12시 30분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손만 씻고 애들 먹을 것을 챙겨주었다.

* 새벽 1시
  샤워라도 하면 좀 나을 것 같은데, 두놈들 샤워 끝나려면 어느 세월에... 힘겹게 몸을 움직여 이불을 편 다음 바닥에 드러눕고 나니 마치 마비라도 된 것 같이 몸이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 새벽 2시
  방금 전에 시계를 본 게 1시였던 것 같은데, 눈 떠 보니 벌써 2시가 되어 있다. 아직도 한 놈은 샤워를 하고 있고, 잊기전에 9일 기도 해야지 싶어 기어가다시피 묵주를 가지고 와 손에 들긴 했지만 몇단까지 했을까?

* 새벽 2시 30분
  드디어 애들이 샤워를 다 마친 것 같은데, 도저히 몸이 일어나지지가 않는다. 아뿔싸... 손가락에는 힘이 다 풀리고 묵주는 방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몇단까지 한걸까? 첨부터 다시 해야 하나??? ㅠㅠ

* 새벽 4시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벌써 4시다. 인제는 지하철이 다니기 시작할텐데... 원래 계획대로 한다면 30분 전에 일어나 이 시간에 지하철을 타고 나갔어야 하는데, 지금은 엎드린 채로 베개에 파묻은 얼굴을 반대로 돌려 돌아눕는 것조차 할 수가 없다.

* 새벽 6시
  불도 안 끈 채로 잠이 들어버리기는 했지만, 바깥에 하늘이 점점 밝아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6시면 꽤 늦은 시간이 되어 버렸는데, 내가 찜해 놨던 자리는 과연 아직도 비어 있을까?

* 아침 7시 30분
   시계가 6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아직도 그 자리가 비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던 것은 기억이 나는데, 누군가 시간을 훔쳐 간 것처럼 시계는 이미 7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엎어진채로 시체처럼 있었는지, 목도 아프고 팔도 저리고 얼굴도 퉁퉁 부었다. 딱딱하게 굳어진 몸을 간신히 돌려 똑바로 누웠다.
   지금 바로 나가더라도 도착하면 8시 30분... 이제는 전광판조차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야 할 텐데... 시복식에 가 보겠다는 생각은 접어야 할 것 같았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9일 기도를 처음부터 해서 마치고 난 뒤 불을 끈 다음, 다시 자리에 누워 버렸다.

* 아침 10시 10분
  화들짝 놀라 TV를 틀어보니 시복식 미사는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어느 채널은 무슨 재난 현장을 생중계 하듯 급박한 목소리로 특파원을 불러가며 생중계를 하고 있었고, 어느 채널은 뉴스 진행하듯 중계를 하고 있었고, 그냥 조용히 미사드리는 기분으로 시복식을 보고 싶었지만 맘에 드는 채널을 찾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여기저기 계속 돌리다가 어느 좀 조용한 채널에 고정하고 함께 미사를 드렸다.
  광화문 광장에 가득 찬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저기에 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속상해하는 나자신에게 다시 묻게 되었다.

  '내가 저기 저자리에 가서 있기 위해서 뭘 더 할 수 있었을까?'

  대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Saturday, November 1, 2014

"8월의 크리스마스" - 4분의 2

[2014년 6월 25일 수요일 ~ 8월 2일 토요일]

여기저기... 미국에서 세례받고 신앙 생활을 시작한 탓에 한국에는 별로 아는 사람도 없지만, 그나마 성당에 연고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한번쯤은 시복식에 참석할 방법이 없을런지 물어 본 것 같다.

"예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본인 확인 절차가 철저해서 다른 사람 티켓을 이용해서 입장을 할 수 없다는 것 같아요. 사정상 못 가는 분이 생겨도 그 티켓은 본인 외에는 쓸 수가 없다고 하네요."
(ㅠㅠ)

"아가, 내 아는 신부님께 여쭤봤는데, 그쪽 성당에서는 신청자가 많아서 아예 40대, 50대 신자들 중에서만 신청받고 다른 사람들은 아예 신청도 안 받았다고 그러네. 좀 어려울 것 같아."
(ㅠㅠ)

"저희 성당에서는 각 반별로 2-3명만 신청을 받았대요. 저희도 신청 못 했어요."
(ㅠㅠ)

"이미 신청하신 분 중에서 캔슬하신 분들이 많이 생겼는데요, 추가로 접수를 받지 않아서 빈 자리가 많은데도 새로이 접수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마도 전국의 신청자들 신원 조회 하고 개인 정보를 담은 티켓을 날짜에 맞춰 발행하는 것도 쉽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ㅠㅠ)

그러고보니, 명동 성당에서는 신청자가 많을 경우, 추첨을 통해 참석자를 선정하겠다는 공지도 웹사이트에서 본 것 같다. 시복식에 참석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그럼.. 가지 말까? 아니야, 그래도 이런 기회 아니면 내가 교황님을 언제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겠어? 성체는 모시지 못하더라도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데 앉아서 시복식 미사라도 함께 드려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근데... 애들은 어떻게 해야 하지? 확보된 자리가 없으면 최대한 일찍 가야 자리를 맡을 수 있을텐데, 입장 시작 시각인 새벽 4시부터 자리 맡으러 나가 앉아서 9시까지 기다려야 하나??? 미사 시간이 최소한 2시간은 걸릴텐데... 새벽 4시부터 11시? 12시??? 비가 오면 어쩌지? 날이 너무 더우면? 길바닥에 앉아야 하나? 방석을 챙겨 가? 배고플텐데... 화장실은? 졸리면? ... 아... 머리가 깨질 것 같다.


[2014년 8월 3일 일요일]

전날이었던 토요일은 폭염 주의보가 내려진 정말 뜨거운 날이었다. 미사 끝의 공지 시간에 명동 성당의 주임 신부님께서 한마디 덧붙이셨다.

"이제 교황님 오실때까지 정말 열흘밖에 안 남았습니다. 날이 더우면 더울까 걱정... 비가 오면 비가 올까 걱정... 정말 걱정만 가득~합니다. 여러분, 기도 좀 많이 해 주십시요. 아주 살짝 흐리게..."

한숨이 섞인 듯한 그분의 부탁 말씀이 왜 그리 내 마음에 와 닿았던 걸까? 아마도 애들 데리고 가서 자리 맡고 시복식 참관할 생각에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나의 걱정과 맞물려 그런걸까?

생각할 수록 이게 보통 일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아이들 둘 가지고도 이렇게 끙끙 거리고 있는데, 이분들은 10만명이 넘는 이들을 챙겨야 하고, 무엇보다도 교황님과 그 일행의 안전과 빡빡한 일정이 물 흐르듯 진행될 수 있도록 만전의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니.. 교황님도 아닌 주교님 모시고 2시간짜리 새성전 축성식 준비하면서도 2주 동안 2킬로그램이나 살이 빠졌던 경험이 있던 나는, 이 시복식 준비라는 것의 무게가 새삼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진심어린 기도가 간절히 필요한 일이로구나...'

그때 나는 깨달았던 것 같다. 이번 시복식을 마치, 마이클 잭슨 내한 공연 정도로 밖에 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까지 내게 있어서 시복식은, 이번 한국 여행에서 건져가야 할 하나의 껀수 정도로 밖에는 되지 않았고, 그때까지의 나에게 교황님이란 결국, 인증샷 하나 남겨 페북에 올려 자랑하고 싶은 그런 해외 저명 인사 중 한명이었을 뿐이었다.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내게 있어서 시복식과 그토록 만나뵙고 싶었던 교황님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를 생각해 본 것이...


[2014년 8월 6일 수요일 ~ 8월 7일 목요일]

미국에서 카톡이 왔다. 지난 주일에 sbs에 방영된 "거리의 교황 프란치스코" 라는교황님에 관련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한국에서 다운받아 보내 줄 수 있을런지 물어보는 메시지였다. 그 덕분에 교황님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리저리 다운받을 방법을 알아 보다가, 그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는데, 이걸 아이들하고 같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아무리 마이클 잭슨이 방한을 해서 그 콘서트 장에 가 본다 한들, 마이클 잭슨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데리고 가 봐야 그게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될까 싶어서 였다.

그리고 큰 타협을 했다. 이 다큐멘터리를 본다고 약속하면 시복식에는 참석하지 않아도 좋다는 거였다. 이 시복식을 참석을 위해서 시차적응도 못 한채로 개학하기 바로 전날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끊어 놓았던 나로서는 아주 큰 좌절이었다. 하지만, 교황님 얼굴이 하나도 보이지도 않을 거라며 처음부터 삐딱선을 타고 있던 큰 아이와 그냥 엄마가 간다니까 뭐하는 줄도 모르고 무턱대고 따라 나설 작은 아이를 데리고 새벽 4시부터 7~8시간을, 땡볕이 될지 비를 맞고 있을지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어야 할지 내내 서있어야 할지 화장실이나 제대로 다녀올 수 있을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차라리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복식이나 교황님에 대해 좀 더 알아가는 시간을 갖는 것이 어쩌면 교육적 차원에서 나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만 엄마랑 같이 본다면 시복식은 안 가도 좋다"
"Hurray~~"
펄쩍펄쩍 뛰며 기뻐하는 아이들 ㅠㅠ... 그게 그렇게 기뻐할 일인건가? 오히려 내가 더 당황스러워졌다.

1시간짜리 프로그램이었는데, 중간 중간 멈춰서 이야기하며 2시간 가까이 걸려 다큐멘터리를 함께 보았다. 나름 노력하고 있는 엄마를 눈꼽만큼이라도 신경써 준다면 이럴 수 있을까? 큰아이는 프로그램내내 보란듯이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작은 아이는 그저 졸음이 가득한 눈이다.

'Promise is a promise! 그래, 내가 이것만 보면 시복식 안 가도 좋다고 약속을 했으니, 약속은 지킨다.'

프로그램이 끝나자 마자 갑자기 생기가 도는 아이들을 보며, 이것도 결국 내 욕심이었는지, 내려놓고 나니 차라리 내 마음도 편해졌다.

이쯤되고 나니, 비행기표를 바꾸어 빨리 미국으로 보내서 시차 적응이라도 시켜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결정적으로, 시복식 전날 밤에 열리는 SM 타운 월드 투어 2014 콘서트때문에 어차피 일정을 조정하기는 어렵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4년 8월 10일 일요일]

주일 미사 끝 무렵에, 명동 성당 주임 신부님이 또 한마디 덧붙이신다. 그날은 영성체 중에 코 앞에서 사람이 쓰러지는 바람에 정신이 홀딱 나가버린 탓인지 표현이 정확히 생각나지는 않지만 대충, '시복식에 직접 참석하고 안하고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때는 이미 교황님과 같은 하늘 아래 있는 것이고 TV에서라도 시복식을 보면서 같은 마음으로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뭐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참석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신자들을 위로하고 싶으셨던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 말씀이 약간은 위로가 되기도 했다. '그래.. 신청자가 많아서 제비 뽑기했는데, 거기서 꽝 뽑은 셈 치자, 뭐...' 원래 그런 쪽으로는 영 운이 따르지 않는 편이어서, 진짜로 제비를 뽑았다면 아마도 영락없는 꽝이었을 것이다.

'성체만 못 모시지, 근처에 가서 앉아있으면 되지 뭐.. 인제는 애들 챙길 필요도 없고, 나야 뭐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상관없으니까...'

명동 성당에서 삼청동으로 장소를 옮겼다가 정동에서 있는 저녁 스케쥴 사이의 잠시 시간이 비는 사이에, 발걸음을 광화문으로 옮겼다. 이제는 아주 본격적으로 사전 답사를 하고 싶었다. 어느 지점에서 자리를 잡으면 광화문 앞 (제대가 설치될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이 그나마라도 잘 보일 수 있을런지 여러 지점에서 직접 보고 싶었다.

미리 사전 답사없이 갔다가 '여기가 아닌가벼' 했다가는, 지하철, 버스할 것 없이 그 일대 지역의 교통이 모두 통제되는 상황에서 안국동에서 시청앞까지 걸어가야 할 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고, 사실 걷는 것이 두렵지는 않지만, 그 걷고 있는 와중에 "로얄석"은 눈깜짝할 사이에 다 차 버릴 것이 뻔하니 일분 일초가 중요한 상황이었다.

근데... 날씨도 안 도와주네 ㅠㅠ.

그동안 오지도 않던 비가 오후부터 심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삼청동에 있을 때만해도 그나마 우산을 쓰면 돌아다닐만 했었는데, 광화문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걸어다니기가 힘들 정도가 되었다. 세종문화회관 입구 처마 밑에서 비가 좀 잦아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엄마, 언제까지 여기 있을거야?" 하며 징징대는 아이들...

'내가 더 궁금하다, 이 녀석들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해 봤지만, 비는 기세를 더 해 가고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웠다. 결국, 사전 답사로서의 마지막 기회를 포기하고 정동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2014년 8월 11일 월요일]

시복식 날짜가 다가오니, 시복식날 교통 통제 정보가 인터넷에 뜨기 시작했다. 교통청에서 게시한 지도를 보니, 광화문 광장앞을 어떤식으로 사용할 것인지 대략 감이 잡혔다. 그동안 광화문 앞을 지날때마다 봐 둔 두 지점,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과 문화체육관광부 건물의 옆 계단 정도면 괜챦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4년 8월 14일 목요일]

교황님이 한국에 도착했다고, TV랑 뉴스에 교황님의 행보가 거의 생중계 되다 시피 하고 있었다. 그치만 나는, TV보다는 인터넷에서 지도 하나를 뚫어지게 들여다 보고 있었다.

교통 통제 관련 지도보다 더 상세한, 시복식날의 폴리스 라인이 표시된 지도였다. 참석자들은 폴리스 라인 안쪽에서 미사를 보겠지만, 나 같은 구경꾼들은 폴리스 라인 바깥쪽에 자리를 잡아야 하기 때문에, 이 지도는 내가 가장 알고 싶었던 정보를 담고 있었다.

막상 그 지도를 보니, 내가 자리를 잡으려고 봐 두었던 자리의 1순위였던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 건물의 옆 계단이 마치 폴리스 라인의 안쪽인 것 같이 보였다. 대충 도로와 주요 건물의 윤곽만 표시한 지도였기 때문에 구글맵의 위성 사진이랑 대조를 해 봐도 감이 잘 잡히지가 않았다. 그래도 모험을 하기에는 일초일각이 아쉬울 것이어서 이 자리를 포기하고 세종문화회관 옆 계단에서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문제는, 그 계단까지 도달하는 경로가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는 점이었다. 시복식 제대 쪽에 가장 가까운 경복궁역이 폐쇄되니 안국역에서 내린다면 광화문 앞으로 가로질러 갈 수가 없어 경복궁을 끼고 외곽으로 청와대 앞까지 빙 돌아서 3 km가량을 걸어 접근해야 하고, 경복궁 다음 역인 독립문 역에서 내린다면 버스나 택시 없이는 사직터널을 터덜터덜 걸어서 통과하는 수 밖에 없을 듯 싶으니 이건 아닌 것 같았다. 폐쇄되는 5호선 광화문역의 그 다음 정류장인 서대문 역에서 내린다면 정동 고개를 넘어 약 1.5 km를 걸어야 할 것 같고, 2호선 을지로 입구역에서 내린다해도 시청앞 광장을 끼고 돌아야 하니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았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넌다는 말은 이럴때 쓰라고 생긴 게 아닐까?

나오는 건 한숨 밖에 없었다.

Friday, October 24, 2014

"8월의 크리스마스" - 4분의 1

이번 여름, 6년만에 한국에 다녀왔습니다. 그것도 2달도 더 넘도록, 아주 티가 많이 나게 다녀왔지요. 미국에 돌아오니 만나는 사람들마다 한국 잘 다녀왔느냐고 묻더군요. 물론, '아주 자~알 다녀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들 개학이 곧 다가오는데도 불구하고 개학 직전까지 한국에 머무른 이유를 아는 사람들은 다른 질문을 합니다, 시복식 잘 다녀왔느냐고... 제 대답은 '아니요, 못 갔습니다' 였습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시복식 미사에 참석하지는 못하고 그냥 돌아왔지만, 단순히 "아니요, 못 갔습니다" 하고 짧은 한마디로 넘어가기에는 그 뒤에 못다한 이야기가 너무나 많네요. 그래서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적어두고 싶은 생각이 들어, 시간순으로 일지를 적듯이 적어보았습니다.


[2014년 3월 8일 토요일]

어느 반모임에 갔다가 우연히 교황님이 8월에 한국을 방문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번 여름에 한국에 다녀올 예정인데 교황님 일정에 맞추어 얼굴이라도 한번 뵐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자, 갑자기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어갔다.


[2014년 5월 17일 토요일]

교황님의 방한 소식을 들었던 바로 그 반모임이 있었다. 사람들이 내게 물었다, 시복식에 진짜 갈 거냐고...

틈날때마다 교황님의 방한 일정을 인터넷에서 검색하고 있다가, 일정이 확정되고 나자 그에 맞춰 비행기표를 이미 끊어 놓은 상태였다. 큰아이 학교의 개학과 일정이 맞물려서 고민이 많았지만 그래도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교황님을 볼 수 있으랴 싶어 과감하게 질렀다. 이제는 틴에이저가 된 큰 아이는, 시차 적응도 안 되고 학교 생활 시작에도 지장이 있을거라며 엄청나게 불만을 토로했지만 나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이건 일생에 두번 오지 않을 기회야."

사람들이 몹시 부러워했다. 나도 기대가 많이 되었다. 어떤 자매님은 예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한국 순교자 103위의 시성식을 여의도 광장에서 집전할때 엄마를 따라 갔었는데, 그때 하늘에 나타난 십자가를 보았다고 했다. 얼마전에 몇몇 다른 분들부터도 그때 하늘의 십자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이번 시복식때에도 그와 비슷한 또 다른 신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기대가 더 많이 되었다.


[2014년 6월 4일 수요일]

얼마전부터 성당에 교황님 얼굴이 들어있는 포스터가 붙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동안은 별로 주의깊게 들여다 보지 않았는데, 오늘은 길잡이 학교를 다녀오는 길에 무심결에 포스터를 들여다 보게 되었다.

  


시복식 참가 신청 안내 포스터였다. 시복식 참석과 더불어 여기저기 성지 순례를 하는, 결국은 관광 상품처럼 보였다. 한국어권 신자는 5박 6일 동안 약 900불의 비용을 들여 성지 순례를 하게 되지만, 영어권 신자는 기간도 두배였고 약 1700불의 비용이 필요했다. 나와 아이들 둘을 감안하면 한국어권으로 신청을 해도 거의 삼천불에 해당하는 돈이, 하지만 사실상 영어가 더 편한 아이들때문에 영어권으로 신청을 하게 되면 오천불이 넘는 돈이 필요했다. 게다가 개인적으로는, 성지 순례 코스에 포함된 몇몇 성지는 이미 방문했던 적이 있었고,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려면 이미 한국에서 체류하고 있는 와중이어서 이중으로 숙박비를 물어야 하는 부담도 있었다.

'헐~ 참가비가 꽤 비싸네... 난 안 되겠다.'

대충 읽어보고 지나쳐 몇걸음 가다가, 그치만 왠지 모르게 이 내용을 알고 있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걸음을 돌려서 다시 포스터 앞으로 가서 사진을 찍고 집으로 돌아왔다.


[2014년 6월 7일 토요일]

드디어 내일이면 한국행 비행기를 타게 된다. 출국일이 주일이었던 관계로, 토요 특전 미사를 드리러 가면서 만나는 분들께 인사를 드렸다. 본당 신부님께도 인사를 드렸는데 언제 돌아오느냐고 물으셨다.

지아나: "8월말이나 되어야 될 것 같아요."

본당 신부님: "꽤 오래 계시네요."

지아나: "네, 한국간 김에 시복식도 보고 오려고요..."

본당 신부님: "응? 그거 신청해야 갈 수 있는데? 신청했어요?"

지아나: "아니요? 신청이요???"

본당 신부님: "교구에서 하는 거 보니까, 신청한 사람만 갈 수 있는 것 같던데... 알아서 잘 하실 줄 알았지."

지아나: #@%$...

신부님이 계속해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데 귀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나도 뭐라고 대답을 한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신청??? 예전에 시성식 참석했다는 사람들 아무에게서도 신청해서 갔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머리가 띵했다. '맨날 우물안 개구리처럼 살더니만 결국은 한건 했구나 ㅠㅠ...'

신부님 어깨 너머로, 시복식 참석 신청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1차 신청 마감일은 6월 20일.

'저 돈을 내고 신청을 하면 아직도 가능은 하겠구나... 근데... 정말 저렇게 하지 않고는 갈 수가 없는 걸까?'


[2014년 6월 9일 월요일 ~ 6월 13일 금요일]

한국에 도착하자 마자, 시복식에 어떻게 참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지 여기저기 물어보았다.

"이미 1차와 2차에 걸쳐 참석을 원하는 사람들 신청을 받았고 신청자들의 신원 조회를 할 거예요. 2차 접수는 마감한 게 얼마 안 되었는데..."

"글쎄... 얼마전에 신청받고 하는 것 같던데... 난 시성식도 가보고 그래서 이번엔 신청 안 했어. 우리 본당 신부님은 그래도 서울교구 안에서 유명한 분이시니까 한번 물어볼께. 아가, 걱정하지마."

느낌이 안 좋다. 한국에서는 이미 신청이 끝난 모양이다. 혹시라도 추가 신청 접수를 받을런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기다리기 보다는 아직 신청 접수가 진행중인 미주 쪽에서 알아 보는게 확률적으로 높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해서, 지난주에 혹시나 하여 찍어둔 포스터 사진을 다시 찾게 될 줄이야...

포스터에 나와 있는 연락처를 자세히 보니 여행사 직원이다. 관광은 안하고 시복식만 참석하고 싶다고 하면 싫어할 것 같은데... 이번 북미쪽의 시복식 참석을 주관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북미주 한인 사목 사제 협의단을 통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쪽 웹사이트를 찾아 대표 연락처와 함께 여행사 직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시복식에만 참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하고...

꼬박 이틀 동안 답장을 기다렸다. 아무도 답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국제 전화를 걸었다. 처음엔 포스터에 있는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벨소리가 몇번 울리는데 그냥 끊어 버렸다. 아무래도 여행사와 얘기하면 대답은 뻔할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다시 북미주 한인 사목 사제 협의단 웹사이트를 찾아가 대표 전화 번호를 눌렀다.

다행히 시복식 관련 담당자와 직접 통화를 할 수 있었다. 한국 준비측과는 북미쪽에서는 투어 패키지에 참석하는 사람들에 한해 시복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었기 때문에 장담은 할 수 없으나, 나같이 시복식 참석만을 원하는 사례들이 좀 있어서 한번 알아보겠다고 하면서 참석을 원하는 사람들의 신상 정보를 이메일로 보내라고 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혹시라도 마음이 바뀔까봐 얼른 이메일을 보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희망이 있어 보였다.

'휴~~ 다행이다.'


[2014년 6월 14일 토요일 ~ 6월 20일 금요일]

'포스터에 표시된 1차 마감일인 6월 20일이 다가오고 있는데,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국제 전화를 다시 한번 해 보는 게 나을까??'

아니... 마감 전에는 전화해 봐야 마감될때까지 기다리라고 할 것 같았다.

'일단 신청의사는 밝혔고 신상 정보를 넘겼으니 마감때까지 기다려 보자.'


[2014년 6월 21일 토요일 ~ 6월 23일 월요일]

'이제 1차 마감은 되었을텐데, 하필이면 주말이라 지금 전화를 해도 통화가 될까 모르겠네. 미국 시간으로 월요일까지 기다려야 하나???'

미국 서부보다는 16시간이나 빠른 관계로, 한국에서는 월요일이 되고 나서도 다시 16시간을 더 기다려야 통화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각이 여삼추로구나...ㅠㅠ'


[2014년 6월 24일 화요일]

한국 시각으로 24일 화요일 이른 아침, 눈을 뜨자마자 세수도 안 한 채로 북미주 한인 사목 사제 협의회에 국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어느 남자분... 담당자가 지금 회의 중이라고 했다. 할 수 없이 전화를 받은 분께 물어보았다.

지아나: "성지 순례에는 참가하지 않고 시복식만 참석하고 싶다고 신청했던 사람인데요, 어떻게 처리가 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주관측: "시복식에 관련한 문의는 OO 투어에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지아나: "그건 이미 알고 있는데요, 투어 회사는 아무래도 투어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우선권을 줄 것 같아서, 사정상 투어에 참석할 수가 없어 주관 협의회 쪽에 직접 문의를 드렸었습니다."

주관측: "시복식 관련한 것은 모두 그쪽 회사로 넘겼으니 그쪽에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지아나: "예전에 담당자분이 투어는 하지않고 시복식 참석만 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좌석을 더 배정받을 수 있을지 알아본다고 하셨었는데, 혹시 그 부분과 관련해서 어떻게 결정되었는지 아시는 바는 없으신가요?"

주관측: "시복식 관련해서 모두 그쪽 회사로 넘어갔으니 그쪽에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지아나: "시복식 참석자 좌석 확보 같은 것은 한국 서울대교구의 시복식 준비 위원회와 직접 상의하고 결정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런 것도 투어 회사에서 직접 하나요?"

주관측: "시복식 관련한 것은 그 투어 회사에서 주관하고 있으니 그쪽에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담당자가 아니어서 잘 모르겠다고 했더라면 오히려 나았으련만... 자기 소관이 아니라는 듯 녹음기처럼 똑같은 말만 되풀이 하고 있는데, 갑자기 화가 났다. 시복식 관련해서 모든 걸 다 투어 회사에서 '주관'하고 있다면 도대체 그 포스터에 적혀있는 '주관: 북미주 한인사목 사제 협의회'란 문구의 의미는 무어란 말인가?

지아나: "그렇다면, 시복식 신청 포스터에는 북미주 한인사목 사제 협의회가 '주관'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요, 그 '주관'의 의미는 무슨 뜻입니까? 북미 지역 신자들의 시복식 참석을 위해서 북미주 한인사목 사제 협의회는 무슨 역할을 한 건가요? 투어 회사에 모든 것을 일임한다면 아무래도 비지니스를 생각해야 하니까, 투어를 하지 않고 시복식만 참석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쪽에서 원치 않을 게 뻔하지 않습니까? 이게 시복식을 위한 투어입니까? 투어를 위한 시복식입니까? 시복식이 중요한 거라면 영리단체가 아닌 사제 협의회가 오너쉽을 갖고 시복식에 참석을 원하는 사람들은 참석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정말 실망스럽습니다."

원래 남들 앞에서 생각을 조리있게 얘기하는 편이 못 되는 것을 평소에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누가 이미 써 준 문장을 읽기라도 하듯이 천천히 또박또박 얘기하는 내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 자신조차 깜짝 놀랐다.

이야기 중간에 주관측에서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몇번 했던 것 같은데, 담당자가 회의 중에 잠시 나와 전화를 받았다.

담당자: "*** 성당의 xxx 씨 맞으시죠? 투어 참석을 하지 않으시는 분들을 위한 추가 좌석 확보는 못한 상태이구요, 그쪽(시복식 준비 위원회)에서 참석자 신상 정보를 빨리 넘겨달라고 하는 바람에 당초 계획했던 7월 20일날 2차 접수 마감 대신 6월 25일로 모든 신청 접수를 마감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시복식 참석 관련해서는 모든 것이 투어 회사로 넘어갔기 때문에 저희도 지금으로서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쪽에 연락하셔서 문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아나: (이쯤되니 더이상 할 수 있는 얘기가 없더군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다시 투어 회사로 국제 전화를 걸었다.

지아나: "혹시 성지 순례에 참석하지 않고 시복식만 참석하는 것이 가능한지 궁금한데요..."

투어 회사 담당자: "지금으로서는 시복식에 확보된 좌석보다도 신청자 수가 많아요. 그분들이 시복식 참석하려고 그 돈을 내고 성지 순례에 참석하시겠다고 하시는 건데, 그분들이 가셔야 하지 않겠어요?"

지아나: "....... 네, 알겠습니다."

그쪽에서는,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 쓴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아주 단호하게 잘라 이야기를 했다. 전화기를 내려 놓으면서, 이제는 시복식에 가보고 싶은 욕심도 같이 내려 놓아야 하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Thursday, October 16, 2014

러버덕 (Rubber Duck)

러버덕(KBS 뉴스에서 사용한 이름)이 한국에 떴군요. 세상에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10월 13일자 KBS 뉴스를 보던 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어린이들의 목욕 장난감인 러버덕을 본따 만들어진 16미터 (6층 건물) 높이에 1톤 가량의 초대형 러버덕인데, 석촌 호수 위에서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네요. 플로렌타인 호프만이라는 네덜란드 설치 미술가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2007년 프랑스를 시작으로 해서 미국, 홍콩, 일본 등 전세계 순회 전시중이라고 합니다. 호숫가를 지나던 사람들은 그 초대형 오리를 보고는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가는 듯 했고, 그 오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저의 관심을 끈 것은 그 초대형 러버덕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만든 미술가의 인터뷰 내용이었습니다. 아마도 '왜 이런 작품을 만들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7초가 안되는 그 짧은 시간동안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To get you out of your daily life and... well... to let you stop... and look! (일상으로부터 여러분을 데리고 나오기 위해서, 그리고... 음... 여러분이 (하던 일을) 멈추고... 눈길을 돌릴 수 있도록...)"

저는, 이 미술가가 "let you stop"이란 표현을 썼다는 것이 굉장히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사역 동사 make와 let의 차이를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만약 이 미술가가 "make you stop"이란 표현을 사용했다면, 우리가 하던 일을 멈추고 러버덕을 바라봐 주기를 원하는 것은 바로 그 미술가가 되지만, 그는 "let you stop"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며, 그는 단지, 잠시 일손을 멈추고 숨돌리고 싶어 하는 우리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꿈보다 해몽이 더 좋은가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치만, 우리가 너무 앞만 보며 달려 가면서 내 주변의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가져왔기에 이런식으로 해석을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의 삶이 너무 바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할 일도 너무 많지만, 챙겨야 할 것도 너무 많고... 나이드신 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저보다도 한참 어린 친구들 중에도 깜빡깜빡하다가 어처구니 없는 실수한 얘기들을 하면서 '난 정말 문제가 많아' 하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글쎄... 과연 그것이 그 개인의 문제일까요? 세상의 모든 것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점점 해야할 일, 알아야할 일, 챙겨야 할 일이 많아지고 점점 더 빨리 해내지 않으면 안되도록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정보의 양과 그 처리의 속도를 한참 넘어선 그런 세상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앞만 보고 정신없이 전속력으로 달려가더라도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라고 하면 맞겠죠. 그러다보니, 잠시 멈춰서서 숨고르기를 할 틈도 없고, 옆을 돌아볼 여유는 더더욱 없는 것이구요...

요즘같은 세상에, 하루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푹 자고 싶고, 며칠만 휴가 좀 썼으면 좋겠고,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지금 눈앞에 벌어진 일을 당장 해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과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그것조차 쉽지 않은 듯 싶습니다.

이렇게 잠시 일손을 멈추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서, 이 미술가는 잠시 그럴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 주고 싶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잠시 멈춰서서 쳐다볼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그런 초대형 러버덕을 만들어서 말이죠. 그래서 이 오리는 미술 전문 전시관 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일상 공간 속에서 더 진가를 발휘하는 멋진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1년쯤 전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운전을 하다가 동네 어귀에 있는 Stop 싸인 앞에 잠시 멈춰 섰는데, 차 안에 타고 있던 작은 아이가 "엄마, 저기 꽃 좀 봐" 하더군요. 고개를 돌려 보니, 그 싸인 근처의 화단에 하얀색 칼라꽃이 참 아름답게 피어 있었습니다. 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이런저런 꽃을 많이 보게 되더라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채 들기도 전에 지나쳐 버리는 것이 일상이었었는데, Stop 싸인 앞에 잠시 멈춰섰다 보게 된 그 꽃을 보면서는, 닫혀진 창문 틈으로 마치 그 꽃의 향기가 스며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그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가 있었습니다.

잠시 멈추지 않으면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들이 많습니다. 잠시 멈추지 않으면 눈에 보이긴 해도 그냥 의미없이 보내버리고 마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 미술가는 저절로 눈길이 가는 이 러버덕을 통해서, 우리 일상을 잠시 멈추고 어렸을때 목욕탕에 앉아 똑같은 모양의 오리 인형을 가지고 놀던, 이제는 우리의 기억속에서 저만치 밀려나버린 그 근심걱정없던 동심의 세계로 우리를 잠시 초대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우리가 잠시라도 멈추어 서기 위해서는, 이렇게 두 눈이 번쩍 뜨이도록 6층 건물 높이만큼이나 커다란 초대형 러버덕, 아니면 Stop 싸인과도 같이 싫든 좋든 멈춰서지 않으면 안되는 강제 규정이 있어야 할 정도로 세상이 녹녹치 않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되었든 잠시 멈추었을때 느낄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느낌, 나를 둘러싸고 있는 풀과 나무와 꽃들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 안에서 솟아나는 감사와 찬미, ... 이런 것들을 좀 더 자주, 좀 더 많이 느끼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러버덕이나 Stop 싸인이 아니더라도, 좀 더 자주 멈추어서서 주변을 돌아보는 연습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멈추기 힘들면 조금만 더 천천히 가 보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목욕탕 구석에 굴러다니고 있는 조그마한 러버덕만 보더라도 금새 동심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Friday, October 10, 2014

공짜

길거리를 운전하고 지나가다 보면 집 앞의 길가에 FREE 라고 대문짝만하게 종이에 써서 붙여놓은 물건들을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보통은 집에서 더이상 사용하지는 않고 버리기엔 아까와 구석에 쳐박혀 있다가, 주인장이 큰 맘먹고 누구 필요한 사람있으면 가져가라 하고 내놓은 물건들입니다. 유학생 와이프로 어렵게 생활하던 당시, 크레이그 리스트를 통해 남들이 버리는 물건을 자주 얻어다 사용했던 전력이 있는지라, 누군가 집앞에 내놓은 공짜 물건이 있으면 저는 지금도 남다르게 눈여겨 보는 편입니다.

오늘은 큰아이가 다니는 중학교에 데리러 가는 길에, 학교앞 건널목 길가에 놓여진 FREE 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공짜라는 말에 눈이 번쩍 띄였죠. 중간(?) 크기 쯤 되는 상자 였는데, FREE 라고 써진 사인이 상자 안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상자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근데 FREE 아랫쪽으로 무슨 단어가 더 써 있더군요. 5개의 알파벳으로 구성되어 있는 단어의 아랫쪽 절반쯤이 상자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B로 시작하는 단어 같아 보였고 다음 알파벳은 1 자 같이, 그 다음은 그 두개가 반복되는 것 같아 보였는데 차를 타고 스쳐지나면서도 무슨 단어일까 머리를 굴렸습니다.

'BIBLE???'

그러고 보니, 맞는 것도 같아 보이더군요.

'도대체 어떤 사람이 Bible을 공짜로 가져가라고 내 놓은 걸까? 집에서 굴러다니던 애물단지였었나? 아주 오랜된 것이면 지금 쓰이는 것과는 표현도 조금씩 달라졌을텐데... 가구나 가정용품을 집앞에 내놓고 그냥 가져가라는 건 종종 봤어도, 쓰던 성경책을 내놓고 공짜로 가져가라는 건 정말 첨 보는군...'

그대로 상자를 지나쳐가서, 아이를 태우고 그 상자가 놓여있던 건널목에서, 빨간 신호등에 걸려 신호 대기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무심코 오른쪽 옆에서 나란히 대기하고 있는 차를 보게 되었는데, 창문이 열려진 상태여서 그 안이 다 들여다 보였습니다. 운전하는 아줌마 한분과 카풀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남학생이 3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 중의 2명은 손바닥만한 수첩같은 것을 신기한 듯 들여다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상당히 들어보이는 어느 백인 할아버지가 그 나머지 학생 1명에게 창문 너머로 그 수첩같이 생긴 것을 건네주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보아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제법 고급스런 재질의 양장 커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지요. 3명의 학생들은 그 수첩같이 생긴 것을 여기저기 뒤적거리고 있었고, 이번에는 운전자 아줌마가 할아버지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건네더군요. 그랬더니 그 할아버지는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갔는데, 그곳에는 아까 보았던 바로 그 FREE BIBLE 상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상자 속에서 바로 그 수첩같이 생긴 것을 꺼냈고 다시 차로 돌아와서 아줌마에게 건네 주었다.

'저 수첩같이 생긴 것이 성경책이었나???'

크기가 상당히 아담한 것이 아마도 휴대하기 좋게 만든 포켓사이즈 성경책인 듯 싶었습니다. 그때 그 할아버지는 옆에 지나가는 어느 여학생에게 똑같이 생긴 성경책을 건네주려고 했는데, 그 학생은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젓고는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어, 이건 집에서 굴러다니던 애물단지 성경책이 아닌가벼???'

성경책 상자로 눈길이 갔습니다. 건널목에 서 있던 어느 남학생 하나가 주변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상자로 걸어가서 성경책 하나를 꺼내 이리저리 펼쳐 보았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분위기의 다른 할아버지 한 분도 그 상자에서 성경책을 꺼내고 계시더군요.

'엉?? 한 사람이 아니었어???'

건너편 건널목으로 눈을 돌리니, 건너편에도 똑같은 상자가 있었고 비슷한 차림의 할아버지 한분이 상자 옆에 서 있었습니다.

'아~~ 선교 목적으로 중학생들에게 포켓 성경책을 나눠 주고 있나 보구나...'

그때 신호등은 파란색으로 바뀌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학생들이 한꺼번에 건널목으로 쏟아져 나오는데 손에 손마다 그 성경책을 들고 있었지요. 어떤 학생은 뒤적거리는 차원을 넘어서 열심히 읽으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궁금한 생각이 들더군요.

'이렇게 나누어 주면 과연 얼만큼의 학생들이 성경을 읽게 될까?'

성경책을 받아든 사람들의 대체적인 반응은 여기저기 펼쳐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과연 어떤 구절이 눈에 들어왔을까요? 그들은 과연 언젠가 알게 될까요? 영원한 삶으로 가는 열쇠를 오늘 공짜로 받았다는 걸...

Tuesday, September 30, 2014

머리 자르는 날

어제 드디어 13살난 아들내미가 머리를 잘랐습니다. 마지막 자른지 두달만의 쾌거(?)인 것 같네요. '아니, 아들내미 머리자른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블로그까지 쓰고 그러나?' 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그런분들은 아마도 최근에 저희 아이를 본 적이 없는 분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희 아이를 보면 한마디씩 안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넌 왜 머리 안 자르냐?" 하시는 분, "철수야, 담에는 머리 좀 자르고 와" 하시는 분, "머리 그렇게 기르고 다니면 쿨 해 보이니?" 하는 친구 엄마, "얘, 그렇게 앞머리가 길면 이마에 여드름 더 많이 난다" 하는 엄마 친구, "내가 엄마라면 자고 있는 동안에 몰래 가서 살짝 머리 잘라 버리겠다" 하는 11살짜리 딸내미 친구, ... 심지어는, 온 가족이 다같이 껌을 씹다가 슬쩍 붙여놓고 실수로 껌이 머리에 붙은 척 하며 "어떡하니? 머리를 좀 잘라야 겠다" 하라는 둥 갖가지 아이디어도 제공해 주십니다.

사실 머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난 겨울부터 올 6월까지 자기 맘에 드는 바지 2개와 검은색 잠바 1개로 났습니다. 섭씨 30도가 넘었던 5월의 어느날, 신호대기 중에 함께 옆차선에서 대기 중이었던 학교 엄마가 차의 창문을 내리고 결국은 한마디 합니다. "언니, 언니는 좋겠어. 철수 옷 값이 하나도 안 들어서..." "아니, 죽겠어. 딴 옷 사다 줘도 입지도 않고 바지 1개 입고 가면 바로 다음 바지 빨아놔야 해서 매일 빨래 해야 돼. 죽겠어. ㅠㅠ" "언니, 잘해 봐, 빠이"... 그나마, 하루에 4계절이 다 나타나는 북가주의 기후와는 달리, 이번 여름은 무더운 한국에서 보낸 탓에 그 바지, 잠바와 씨름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미국에 돌아오자 마자 입기 시작한 그 검은 잠바를 보고 친구 아빠 왈 "드디어 저 검은 잠바가 다시 등장했구만..."

얼마전엔 미사 중 독서대에 올라가 남들 앞에 섰던 적이 있었는데, 미사가 끝나고 어느 자매님이 "아까 그 머리긴 애는 뉘 집 아이래?" "최진사 댁 아이래" "정말??? 그집 엄마 아빠는 멀쩡하던데 애는 왜 그러고 다니게 내버려 둔대???" 하는 얘기도 전해 들었습니다.

ㅠㅠ...

저라고 왜 잔소리를 안 했겠습니까? 저도 걔 머리만 보면 머리속이 근질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멀쩡하게 생긴 녀석이, 이젠 빨래를 하고 났는데도 무릎이 튀어 나와 있는 바지만 입고 다니는데, 학교에 데리러 가긴 하지만 뉘집 아들인지 정말 모른 척 하고 싶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그러고 다니도록 내버려 둔 것이, 자기하고 싶은 머리 모양과 입고 싶은 옷만 고집하는 아이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것을 미적지근한 태도로 묵인하는 저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여우같이 살살 꼬셔서 머리 하나 자르게 만들지도 못하는 곰같은 제 성격 탓일 수도 있고, 매달 머리 깎으러 데리고 가는 것도 일거리가 되니 귀챦아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이 아이가 자기 머리 모양 정도는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없지않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이 아이가 머리 자르기를 원하는 것은, 본인보다는 저의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 그 아이가 있어주기를 바라는 저의 이기심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어느날 들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로서, 자기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당연하겠죠. 제가 그 아이보다 보고 들은 것이 많고, 제가 거쳐왔던 시행착오는 피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를 하지 않을 수는 없더군요. 그러나, 자식을 위한다는 이유로, 혹은 부모인 내가 내 아이를 가장 잘 안다는 핑계로, 제 자신이 이루지 못해 속상했던 것들을 아이를 통해 이루려 하거나, 이상적인 내 아이의 모습을 제 안에 만들어 놓고는 그와 거리가 먼 아이를 보면서 끊임없이 실망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무엇이 진정으로 아이를 위하는 것인지 아직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알고 있는 것은, 아이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하는 많은 것이 제 욕심을 부리는 것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그 덥수룩한 머리와 무릎이 튀어나온 바지를 쳐다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이란 가끔씩은, 제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제 맘에 들지않는 상대방의 방식으로 할 수 있도록 참아주는 것이라고 해도 괜챦을까요?

어쨌든 그렇게 제 속을 끓이더니만, 어제 드디어 그 아이가 머리를 잘랐습니다. 저도 오랜만에 마음이 가볍습니다. 그나저나, 이번엔 얼마동안 저를 시험에 들게 하다가 머리를 자르려는지..

Saturday, September 27, 2014

인간이 5만년 동안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며칠전은 본당의 날이었습니다. 정말로 많은 분들이 몸소 봉사에 참여해 주시고 손수 음식 준비 및 서빙 하는데 참여해 주신 덕분에, 전 신자가 모여 음식도 나누고 푸짐한 선물도 나누고 즐거운 시간도 함께 나누었지요.

한동안 이렇게 저렇게 아프신 분들이 유난히도 많아 기도 부탁드린다는 메일을 자주 보냈었었고, 어느 모임에 가더라도 아프신 분들의 소식이 주된 이야기 거리가 되기도 했었지만, 오랜만에 이렇게 어린 아이들부터 나이 지긋한 원로분들까지 한자리에서 어울리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참 좋았습니다.

며칠전에 이번 행사 준비에 관한 안내 이메일을 드리면서 구역내에 초기 암세포 제거 수술을 앞두신 어느 자매님을 위하여 기도 부탁드린다는 말씀을 함께 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매님께서 수술이 끝나자마자, 많은 분들이 기도해주신 덕택에 수술이 무사히 잘 끝나서 감사의 인사를 전해오시기도 했었지요. 그런데 행사가 거의 끝나고 뒷정리를 하고 있던 중에, 행사 준비에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하다며 그 자매님께서 저희 구역 메뉴였던 비빔밥 위에 얹을 표고버섯 큰것 2봉지를 불리고 볶아서 다른 분을 통해 보내오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5만년 동안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자신에게 봉사하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라 타인에게 봉사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던가요? (조영탁의 행복한 경영 이야기 - 제2459호)

아프고 힘들때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 주고 기도해 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우리들... 이제는 자기 자녀를 위한 기도를 넘어서 자녀의 미래의 배우자를 위하여, 또 그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를 시작한 주변 친구들...그리고 수술에서 미처 회복이 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를 위하여 버섯을 볶아 보내신 자매님... 그분들을 보면서, 우리는 번창할 수 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요... 이 글을 혹시라도 지금 읽고 계실런지 모르겠는데...
자매님, 다음에 또 이러시면 절대로 안 받겠습니다. 아셨죠?

Tuesday, September 16, 2014

어린양의 노래

한동안 슬럼프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동안 이것저것 벌여진 일들도 많이 정리했고 가능하면 제 개인일에 집중하려고 했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숨통이 막히는 것 같이 답답해졌었지요. 얼마전부터는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는 저를 느낄 수 있었고, 성당에 나가는 것조차 힘들게 느껴졌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9시반 영어 미사때 새로이 시작하는 성가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일을 벌이지 않겠노라고 약속도 했지마는, 이걸 '으리'라고 불러야 하는 건지... 그동안 노래와 음악을 통해 연결되어 산전수전(?)을 함께 했던 끈끈한 인연으로 인해,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결국은 다시 뭔가를 새로이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하지 않을 수 없는 최소한만 하리라 다짐했습니다. 주일날 이외에 갖게 되는 별도의 연습에는 아예 참석하기 어렵다고, 여차 저차한 사정이 있는 날들이 많아 한달에 몇번씩이나 그 미사에 참례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처음부터 공표를 하고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시작을 하니, 함께 연습을 하지 못할 거면 혼자서 따로 연습이라도 많이 해 가야 하는데 이메일로 악보를 보내줘도 들여다 보게 되지도 않고, 카톡 그룹방에서 이런 저런 대화 내용도 대충 눈팅만 하고 나오기 일수고, 마음만 무거웠습니다.

그렇게 미루다 미루다, 하루 전날 처음으로 악보를 들여다 보는데 갑자기 더럭 걱정이 되더군요.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거든요... 그날은 마침 저희집에서 반모임까지 하기로 계획되어 있던 날이라 연습할 시간도 없어서 더더욱 걱정이 되었습니다. 다급한 마음에 당일날 아침 연습 시각을 물어 그때까지 꼭 가서 같이 연습을 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D-Day, 걱정스런 마음에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이것저것 다 챙겨 놓고 나갈 준비를 다 마치기는 했는데, 아직도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주일날 아침 아이들 깨우는데 치러야 하는 전쟁을 생각하니, 또 다시 이것이 충돌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 뭐 딱히 해야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가지도 못하고 서성서성 대다가, 결국 애들 깨워야 할 시간이 되어서야 간신히 깨워놓고는 부리나케 튀어 나갔습니다. 연습이 다 끝나갈 무렵에나 제일 꼴찌로 도착한 저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연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만 개미 목소리로 우물거리면서 연습장에 들어섰지요.

막상 미사가 시작되자, 입당 성가는 몇번인지도 모르겠고, 노래가 끝난 후 제대를 향해 섰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떠보니 다른 성가대원들은 모두 지휘자를 향해 돌아서서 자비송 악보를 펴고 있는데 저 혼자만 제대 보고 서있고, 이번엔 전례 음악 악보, 다음엔 성가집, 이거 들었다 저거 들었다 여기 폈다 저기 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뿐이었겠습니까? 유니송으로 부르기로 결정된 사항도 모르고 있다가 혼자서 되지도 않는 화음 넣고 있고, 게다가 하필이면 신자들에게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앉는 바람에 마음놓고 묻어가지도 못한 채 처음 보는 영어 가사조차 그래도 몇번은 들여다 본 척 하며 노래를 부르려니, 정말 미사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이 잘 나지도 않았습니다.

불과 몇달전만 해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게 이런 부탁하기는 정말 미안하지만 어떻게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며 성전을 나서는 제게 "언니야, 넘 힘들면 안 해도 돼" 하는 우리 씩씩한 지휘자였지만, 그렇게 되어 제가 비워야 하는 그 자리가 얼마나 큰 것인지는, 저도, 그녀도, 그리고 저랑 매한가지 사정의 다른 성가대원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허수아비 밖에는 안 되는 사람일지라도...

'그래, 그냥 립싱크라도 한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둘째 아이 때문에 다음 주 미사를 위한 연습에조차 참석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번 마음을 다져 먹었습니다.

또 다시 바쁜 한 주가 지나갔고, 이번에는 미리 열심히 연습해서 가리라 했던 다짐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핑계로 결국 악보 한번 펴보지도 못한채 다시 주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번만큼은 시간 맞춰 연습장에 도착하리라 마음 먹었었는데, 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남편이 그날은 아주 일찍 성당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아이들을 제가 데리고 가야 한다는 뜻인데, 미사 시작 한 시간전인 연습 시간에 맞추어 성당에 도착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꾸물거리는 아이들을 다그치며 간신히 성당에 도착하긴 했는데 이미 연습은 끝난 후였고, 벌써 다음번 팀이 연습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황급히 성전으로 들어가, 이미 자리잡고 앉은 성가대원들 자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앉고 보니 성가책도 챙기지 않고 덜렁 전례 악보만 가지고 있더군요. '아... 내가 도대체 이 자리에 왜 앉아 있어야 하는 건가...' 싶은 회의가 밀려왔지만 마냥 그러고만 있을 수도 없어, 영성체 후 불러야 할 특송 멜로디를 옆자리의 친구로부터 급히 쪽집게 과외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 중에, 앞좌석 의자 밑에 놓여 있는 임자없는 성가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마도 지난주에 미사를 마치면서 학생 성가대원들이 의자 밑에 놓고 간 것이 아닌가 싶었지요. 그래도, 그 성가책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선물같이 느껴졌습니다.

선물을 받고나서 감사의 기도를 시작하기도 전에 미사는 시작되었고 옆사람 성가책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입당 성가를 펴 들었습니다. 다행히 지난주에 불렀던 노래였더군요. 급조된 성가대가 계속 새 노래를 배워가는 대신, 먼저 전체 흐름에 익숙해질 때까지 몇개의 노래들을 반복하도록 한 지휘자의 배려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좀전에 급하게 배운 특송도 그렇고 그래도 예전에 한번은 불러 보았던 노래라는 생각이 들자 무겁기만 했던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니 소리도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고, 마치 온 몸이 위로 들려올려질 것처럼 거센 바람을 몰아치듯 힘차게 노래를 부르는 다른 성가대원들에 힘입어, 대영광송의 마지막 소절인 "with the Holy Spirit, in the Glory of the Father. A-men, a-men"을 소리높여 부를때는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잠시 후, 알렐루야를 큰 소리로 부르며 '내가 이렇게 큰소리로 알렐루야를 외쳤던 것이 언제가 마지막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가슴을 꿰뚫는 듯한 신부님의 강론에 이어, 성가책 앞부분의 영어로 된 니케아 신경을 따라 읽으며 신앙 고백을 하는 중에 결국은 눈물이 떨어져 책 위에 그만 자국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거룩하시도다'와 '아멘'을 목놓아 부르며 알았습니다. 이것이, 그동안 아버지 하느님과 눈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써 고개를 돌려왔던 저를 다시 불러주신 초대라는 것을... 길잃은 어린 양이 애타게 어미를 부르듯이 저는 오히려 거꾸로 목이 터지게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와중에, 제가 아버지에게서 애써 멀어져 가려고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영성체 특송 중에 '아베 마리아'를 부를때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고 눈물이 나는 것을 억지로 참았지만, 영성체 후 묵상을 유도하시는 신부님의 말씀을 들으며 결국은 눈물이 흐르도록 온 몸의 힘을 빼었습니다.

한때, 노래를 좀 더 잘 해 보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었습니다. 근처 커뮤니티 컬리지에서 발성 수업을 듣기도 하고, 집에서 5-6시간씩 노래를 부르기도 했었죠. 그런 와중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나도 노래 쫌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착각이란 것도 깨닫게 되었고, 온 몸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가게 되는 때일수록 오히려 힘을 빼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도 배우게 되었고, 다른 악기와는 달리 의식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교감-부교감 신경계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근육과 몸통이 악기인지라 자신과의 심리전에서 이기지 않으면 악기의 모양 자체가 뒤틀려 버릴 수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그러나 제가 알게 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노래를 잘 하고 못 하고는 고운 목소리나 기교에 따른 게 아니라, 어떠한 마음으로 부르느냐이다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좋은 뜻과 마음을 가지고 정성을 다해 노래를 부르면 제가 정말 행복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누군가 별로 좋지 않게 평을 하더라도 별로 속상하거나 하지는 않더군요. 그리고 한가지 신기한 것은, 듣고 있던 누군가에게는 그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더라는 것이었지요. 제가 노래부르면서 행복감을 느끼는 그런 날에는, 떨리는 목소리로 "오늘 노래 너무 좋았어요"하는 분이 꼭 계셨던 것 같습니다. 마치 소리굽쇠의 공명(共鳴) 현상같다고나 할까요?

사람들은 귀에 들리는 노래 소리를 가지고 잘한다 못한다 이야기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보잘것없이 들리는 노래 속에 담긴 마음을 보아 주시겠지요.

아버지 하느님께 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바치고 싶습니다. 노래를 통해 아버지를 부르고,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보잘 것 없는 저의 전부를 담아 아버지께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쓰여지는 도구가 될 수 있기를...

아멘...

Monday, September 8, 2014

둥글게 둥글게...

달빛기도 - 한가위에
                                 이해인 수녀

너도 나도
집을 향한 그리움으로
둥근 달이 되는 한가위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빛처럼 순하고 부드럽기를
우리의 삶이
욕심의 어둠을 걷어내
좀더 환해지기를
모난 미움과 편견을 버리고
좀더 둥글어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려니

하늘보다 내 마음에
고운 달이 먼저 뜹니다
한가위 달을 마음에 걸어두고
당신도 내내 행복하세요, 둥글게!



추석이 다가오면서 어느 분이 이 시를 제게 보내주셨습니다. 읽으면서 "모난 미움과 편견을 버리고 좀더 둥글어지기를" 이라는 구절이 머릿속에 들어와 떠나지를 않더군요. 아마도 요즘 제 마음이 "미움과 편견"으로 울퉁불퉁 찌그러져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오늘은 작은 아이가 눈 두덩이에 두드러기가 나는 바람에 학교를 가지 못했습니다. 약 먹고 계속 자다가, 한국에 머물던 기간 내내 먹고 싶어하던 베트남 포 국수를 먹으러 나갔지요. 너무 기뻐하며 맛있게 먹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이 아이가 이런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이 순간에 이 아이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을 아이 아빠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특히나 요즘 들어서 남편과 많이 다투긴 했지만 동전에는 양면이 있듯이, 원망과 불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감사의 순간들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원망과 불만만을 늘어놓으며 제 자신이 제 마음을 내리찍어 자꾸 울퉁불퉁하게 만들어갔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처음에 한두군데 찍었을 땐 별로 티가 나지 않는 듯 하더니, 이제는 하도 많이 내리찍혀 울퉁불퉁하게 변해버린 제 모습에 오히려 제가 다칠 것만 같이 느껴지는군요.

그래서 오늘은 용기를 내어 "미움과 편견으로 모난" 부분을 내리찍었습니다. 맛있게 먹고 있는 아이의 사진과 함께, '아이가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났다, 감사한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남편에게 감사하다는 표현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싶네요.

저는 아이들에게 처음이 가장 힘들다는 말을 종종 합니다. 저역시 이번에 많은 용기가 필요했지만, 제게 필요한 것을 미리 아시고 채워주시는 하느님이 계셔서 가장 힘든 순간을 넘길 수 있었으니, 앞으로는 좀 더 쉬워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듭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한가위 보름달처럼 둥글어져 있겠지요?

오늘은 한가위로군요. 추석 미사 참례 준비를 다 해 놓고는 깜빡하는 순간에 시간을 놓치면서 결국은 집에 털썩 주저 앉아 있다가 그 사실조차 잊고 있었는데, 잠깐 밖에 나간길에 휘영청 둥근달을 보는 순간에사 오늘이 한가위로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이해인 수녀님의 시를 읽으며 "하늘보다 내 마음에 고운 달이 먼저 뜨기"를 기도해 봅니다. "한가위 달을 마음에 걸어두고 여러분도 내내 행복하세요."

둥글게 둥글게...

Saturday, August 23, 2014

죽었니? 살았니? (블로그를 열면서...)

7월 중순쯤이었을까요? 며칠동안, '인터넷이 죽은 거 아냐?' 하며 하루에 서너번씩 체크했던 적이 있었었지요. 그때마다 인터넷은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인터넷이 죽은 것 같이 느껴졌을까요? 그건 바로, 이메일이며 카톡이며 아무런 소식이 없이 며칠동안 너무나도 조용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도 연락을 안하네...' 하며 좀 야속해지더군요. 그러다가 얼마되지 않아 사람들이 연락을 잘 하지 않는 것은 바로, 제가 사람들에게 잘 연락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옛날 일이 생각나대요.

대학교 3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느날 중학교때부터 절친으로부터 절교장이 날아왔습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절교를 할 만한 사건 사고가 없었는데 왜 절교를 하자고 하는 건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만나자고 했죠. 만나러 가는 순간까지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영문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직접 만나서 친구로부터 들은 이유는 바로, 너무 아무 일이 없어서 절교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연락 한통 없이 그렇게 지내는 게 그게 무슨 친구냐는 거였죠. 그러고보니, 서로 다른 고등학교로 배정받고 난 이후에는 연락이 잦은 편이라 할 수는 없었고, 그나마도 생일을 제외하면 제가 먼저 연락을 한 적은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부터는 연락 자주 하겠다고 약속을 하였고, 그날은 그렇게 넘어갔습니다. 그 뒤로 나름 노력한다고 하긴 했지만, 그 친구의 성에는 차지않는다는 것을 종종 느낄 수 있었고, 제게도 그 '연락'이란 것을 하기 위한 노력이 부담으로 다가오면서, 그 친구와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던 것 같네요.

글쎄... 그때는 잘 몰랐었습니다. 제가 사람들과 통 연락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남들한테는 그렇게 쉬운 전화 한 통화의 수다가 제게는 참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수다떠는 자리에서도, 팔짱끼고 입 꾹 다물고 앉아 듣고만 있으니, '잘난척 한다', '듣기만 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 판단하는 거다', '도대체가 속을 모르겠다', '같이 얘기하기가 불편하다' 등등 여러가지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그런 경우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제가 좀 사오정인 관계로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라서 듣고만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통 연락이니 수다니 잘 못 하는 사람인 것과 이 글이 무슨 상관이냐구요?

언제부터인가, 제가 말로는 수다를 못 떨어도 글로는 할 수 있겠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글 좀 쓴다 잘난 척 한다고 보셔도 할 수 없지만, 그보다는 이 방법이 제게는 좀 더 '쉬운' 수다의 방법이고 제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좀 더 '쉽게' 연락하는 수단이로군요.

도대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한국에 계신 분들은 모처럼 한국에 와 있는데도 연락이 없어서... 미국에 계신 분들은 얼굴을 통 볼 수가 없으니... 한국에 머물던 두달 넘는 기간동안 너무 연락이 없어 좀 섭섭하셨죠? 많이 죄송합니다. 사실, 이제부터 글을 통해서라도 저를 많이 생각해 주시는 분들께 안부를 전해야 겠다고 생각한 게 7월 중순이었는데도, 어영부영하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어 버린것도 죄송합니다.

제가 앞으로 얼마나 자주 글로 인사를 드리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여러분께 직접 전화나 카톡으로 인사드리는 것보다 쬐금은 더 자주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앞으로 얼마나 자주 글로 인사를 드리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글을 올리는 횟수보다는 좀 더 많이 여러분을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